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137 ( 진도. 거제도. 탐라국. 제주도 연혁. )

donkyhote 2012. 4. 5. 18:50

진도(珍島).


목포-완도, 목포-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
해안 일대 간석지가 농경지로 변모되는 진도.
진도 남서쪽에 있는 유인도 42개, 무인도 189개

충무공이 일본 함대를 수장한 울돌골의 거센 조류.
진도는 강화도 - 진도 - 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

전남 서남단 23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진도군.
진도는 진도대교로 육지와 연결되며 교통이 편해졌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유물·유적, 천연기념물, 기·예능보유자가 많은 진도.
진도읍·군내면·고군면·의신면·임회면·지산면·조도면
가사·거차 출장소 등 1개읍 6개면 2개 출장소 96개 동리.

군청소재지는 진도읍 성내리. 면적 427.00㎢,
인구 38,454(2003), 인구밀도 89.3명/㎢(2003).


[연혁]

삼국시대 백제 인진도군(因珍島郡)이 고군면 일대에,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임회면 지역에 있던 백제 영역.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진도현으로 개칭(무안군 영현)
매구리현은 첨탐현으로 개칭, 뇌산군(牢山郡) 영현이 되었다.
940년 고려초 뇌산군이 가흥군으로, 첨탐현은 임회현으로 개칭.

1018년(현종 9) 진도현은 나주 속현으로 병합되고
1144년(인조 21)에 현령이 파견됨으로써 독립했다.

군에서 현으로 강등된 가흥현(嘉興縣:군내면 분토리)
임회현(臨淮縣:임회면)과 함께 진도의 속현으로 합병.

1270년(원종 11) 김통정·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군이
진도에 와 몽골에 저항하다 이듬해 제주도로 쫓겨갔다.
고려말 왜구 약탈이 심해 1350년 영암군으로 피난 했다.

이조에 들어와서도 황폐해진 읍세가 복구되지 않아
1409년(태종 9)에 해남현에 병합되어 해진군(海珍郡).

1437년(세종 19) 다시 두 고을을 나누어 진도군을 설치
1440년(세종 22) 읍 중심지를 외이리에서 진도로 옮겼다.

1866년(고종 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874년(고종 11)에 다시 진도군으로 강등.

진도의 별호는 옥주.
1895년 나주부 진도군,
1896년 전라남도 진도군.

1906년 삼촌면을 해남군에,
명산면을 영암군으로 이관.

1914년 군면 폐합 때 부내면·지산면·조도면은 그대로,
고이면·고일면이 고군면으로, 군일면·군이면이 군내면으로,
의신면·명금면이 의신면으로, 임일면·임이면이 임회면으로 통합

1931년에 부내면을 진도면으로 개칭했으며,
1964년에 조도면에 가사출장소를,
1966년에 조도면 서거차도에 거차출장소를 설치.
1979년에 진도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5년에 진도대교가 준공되 육지와 연결

이조시대 진도는 유배지로서 많은 사대부들이 왕래
육지 문화의 접촉이 많아 다양한 남도 문화를 형성.


[자연환경]

높은 산은 없고 대부분 200~400m 내외의 산지로 이뤄졌다.
진도 동쪽에는 첨찰산(尖察山:485m)·덕신산(德神山:395m),

서쪽에 지력산(智力山:325m)·석적막산(石積幕山:240m),
남쪽에 여귀산(女貴山:457m)·희여산(270m),
북쪽에 고두산(高頭山:252m)·설매봉(雪梅峰:247m)

하천은 지산면에서 인지천, 의신면에서 의신천,
고군면에서 향동천·고군천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소하천이 대부분이라 넓은 평야가 발달하지 못했다.

'해안 일대 간석지가 농경지로 변모되는 진도.'

대부분 진도 남서쪽에 있는 유인도 42개, 무인도 189개,
접도·관매도·동거차도·서거차도 하조도 상조도 가사도

해남 반도와 군 입구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
폭 295m로 바다 조류가 빠르고 거센 울돌목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 영향을 많이 받는 곳.

동백나무·후박나무·참가시나무·감탕나무 등
남도의 정취가 물씬한 남부 수종 숲이 아름답다.


[산업·교통]


군내면 녹진과 해남군 문내면 학동을 잇는 진도대교
주민 80% 이상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진도개 고장.
진도읍·고군면·의신면·임회면·조도면 5개 5일 시장

군 북동쪽 고군면 벽파리에 위치한 벽파항
목포-완도, 목포-제주를 잇는 중간 기착지


[유물·유적·관광]


불교문화재로 군내면 둔전리에 금골산 5층석탑(보물 제529호),
임회면 상만리에 진도 상만리 5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10호),
군내면 용장리에 용장사 석불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호),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대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121호)
월하당부도(月下堂浮屠)·정견당부도(正見堂浮屠)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 : 진도읍 교동리 진도향교(전남 문화재 제127호)

진도읍 성내리 진도 한정석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6호)
의신면 사천리에 운림산방(雲林山房:전남 기념물 제51호)

군내면 용장리 용장산성,
임회면 남동리 남도석성
두 성은 '삼별초' 유적지

군내면 녹진리 이충무공 파왜철삭가설지
충무공의 강강수월래 전술 격전지로 유명.

특히 군내에는 천연기념물과 기·예능보유자가 많다.
천연기념물로 진도읍의 진돗개(천연기념물 제53호),
진도읍 수류리와 군내면 덕병리에 있는 백조 도래지

의신면 사천리의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07호),
임회면 상만리의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1호),
조도면 관매리의 후박나무(천연기념물 제212호) 등

기·예능보유자 최소심은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남도들노래〉(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의 설재천·조공례(曺功禮),
〈진도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의 박병천·채계만·김대례

〈진도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의 강준섭 조담환
〈진도북놀이〉(전남 무형문화재 제18호) 박관용 장성천 양태옥,
〈진도만가〉(전남 무형문화재 제19호) 김항규(金恒奎) 등이 있다.


군내에는 유물·유적이나 천연기념물 등은 물론
군 남서부 도서지역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
주요관광지로는 명량전첩지로 유명한 울돌목해안,

신비의 바닷길, 관매8경, 해안일대의 기암절벽,
남도석성, 운림산방, 용장산성, 금골기암 등등

특히 금골기암과 신비의 바닷길이 유명하다.

군내면 둔전리 금골산에 있는 금골기암은
옛부터 '진도의 금강',또는 '옥주의 계곡'
기암과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관광 명소

진도군 고군면 금계리 회동부락과 의신면 모도리(띠섬)
그 사이에 열리는 바닷길은 매년 음력 2~3월 보름이나 그믐
수심 5~6m이던 바닷물이 갈라지며 약 1시간 바닷길이 열린다.

연간 관광객수는 180만 명 정도인데(1995),
바닷길이 열리는 4~5월에 반 이상 찾아온다.



[교육·문화]

1965년에 개원한 진도문화원에서는
이조 남종문화의 대표화가 허유 추모제.
군에서 소치미술제(小痴美術祭)를 주관

매년 4월 향토문화제인 영등제를 개최하며,
문화 행사로는 축등행렬·각종 민속경연 등

설화

벽파진 할아버지에 대한 유래담을 비롯
<쌀굴전설〉·〈고막뫼전설〉 등이 있다.


민요

〈진도아리랑〉〈강강술래〉〈들노래〉〈살랭이상여소리〉
〈둥덩이타령〉·〈보리타작노래〉·〈맷돌질노래〉 등




거제도.


산동반도에서 일본까지 험란한 항로.

운항 중에 정비하거나 배를 만들던 곳.
옛부터 배 만드는 기술이 앞섰던 거제도.

경남 남해안 거제도를 비롯한 여러 개 도서.
1995년 장승포시와 거제군이 통합해 거제시.
1970년대 이후 삼성조선소·대우옥포조선소 등

신현읍·일운면·동부면·남부면·거제면·둔덕면·
사등면·연초면·하청면·장목면·장승포동·능포동·
두모동·아양동·아주동·옥포동 등 1개읍 9개면 6개동.

시청 소재지는 장승포동. 면적 399.3㎢,
인구 188,850(2003), 인구밀도 471.3명/㎢(2003).

삼국시대 이전 유물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문헌기록으로는 통일신라 이후 것만 전해온다.

677년(문무왕 17) 상군(裳郡)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 상군을 거제군으로 개칭
강주(진주)에 속하고 983년 고려때 기성현
다시 1012년에 고자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말 왜구 창궐로 1271년(원종 12) 거제현이
거창군 가조현으로, 명진현이 진주목 영선현으로
피란한 후 거제도는 수십차례 왜구 침입으로 폐허.

1399년 이조 초 명진현과 강성현(단성)을 합하여
진성현으로 개편후 1428년 명진현은 거제현에 이속

1414년 거제현과 거창군을 합해 제창현으로
이듬해 거제현으로 환원하여 현령을 두었다.

세조 때 산달포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하고,
성종 초 도내 7진에 수군 만호(萬戶)를 두어 경비 강화.
우수영은 오아포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후 고현성으로 이전.

1664년 읍 위치를 고현성에서 옛 명진현 서쪽으로 이전했다.
1711년(숙종 37) 거제현이 도호부로 승격했고, 별호는 기성.

1895년 동래부 거제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남 거제군,
1914년 거제군과 용남군을 통합해 통영군 이운면이 되었다.
1935년 이운면이 장승포읍이 되고, 면사무소를 장승포로 이전.

1953년 거제군으로 개칭해 거제군 소속.
1963년 일운면 고현출장소가 신현면으로,
1979년 신현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66년 어항이었던 장승포항이 개항장이 되고,
1971년 거제대교 개통,
1981년 장승포읍에 옥포조선소 준공

1987년 장승포읍 옥포출장소가 설치되고,
1989년 장승포읍이 시로 승격, 거제군에서 분리.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승포시와 통합해 거제시.


[자연환경]

대체로 산이 많고 북서쪽 해안은 완만
동남쪽 해안은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

북쪽 대금산(438m)자락이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와
동쪽에 국사봉·옥녀봉(555m)·북병산 가라산580m)
서쪽에 시래산(245m) 산방산(507m)·계룡산(566m) 등

둔덕천(屯德川)·고현천(古縣川)·간덕천(看德川) 등 하천
좁은 띠 모양의 해안평야와 만과 곶이 많은 리아스식 해안
대덕도·가조도 등 많은 섬들이 있고 거제·옥포 등의 항만

특히 남동단 갈곶리 일대는 해식애가 잘 발달되어 있다.
식생대는 대부분 온대낙엽 및 상록활엽수의 혼합림이며,
남쪽에는 동백나무·소철·종려나무·팔손이나무 자생지.


교통


14번 국도가 거제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
동쪽 해안을 따라 시의 남단까지 연결된다.

특히 국도와 연결되는 지방도가 통영에서
성포리·장목리·장승포·저구리 등과 연결

해상교통은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1일 12회 운항
장승포동·신현읍·사등면·장목면·하청면을 중심으로
마산·부산·진해 등의 지역과 정기 여객선이 운행된다.

도로 총길이 737.84㎞, 도로포장률 50%이다(1995).


[유물·유적·관광]

거제도는 해금강, 한려 해상 국립공원의 일부
산달도 조개더미에서의 선사시대 빗살무늬토기,
사등면 청곡리의 고인돌, 일운면 소동리 간돌칼

과거 왜구 침입이 잦아 성터가 많다.

둔덕면 폐왕성지(경남 기념물 제11호),
사등면 사등성(沙等城:경남 기념물 제9호),
신현읍의 고현성(古縣城:경남 기념물 제46호)

주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축성.

옥포만 아주동 일대는 신라 아주현이 있던 곳
아주내 바다 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당등산성
일명 옥포성은 옥포조선소의 건설로 철거되었다.

옥포조선소 내의 아양공원에는
충무공의 옥포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건립한 옥포대승첩기념탑과 옥포정.

주요 불교문화재

동부면 부춘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여래입상
사등면 오량리 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48호),
아양동 3층 석탑(경남 문화재 자료 제33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

거제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06호) 반곡서원이 있으며,
거제기성관(巨濟岐城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
거제동헌(巨濟東軒: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 등

동부면 오송리에 고려말과 이조 초 고분 40 기가 있다.
신현읍 고현리에 6·25 당시 국제연합(UN)군 포로수용소
천연기념물로 하청면 느티나무, 거제도 연안 아비도래지,

동부면 학동리 동백림 및 팔색조 번식지.

한반도 제 2 섬 거제도는 한려수도 해상 관광지역.
해당화와 동백꽃이 만발하는 남해안의 명승지이다.
특히 거제도 최남단인 갈곶리와 갈도 일대 해금강

파도의 침식으로 형성된 천태만상의 경관이 절경
그밖에 구조라해수욕장·국사봉·장관대·문동폭포·
동백터널·지심도·구천계곡·묘감숲·사등포 등 유명.

옥포만 인근 지역은 자연·역사·산업 등의 관광자원
해식애 해안과 산이 절경을 이루고 옥포조선소가 있다.

외도의 선착장 -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외도의 열대식물들-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1664년에 건립된 거제향교와 그후 건립된 반곡서원

민속놀이

옛 병사들이 돌로 적을 공격하던 석전놀이 오광대놀이
쥐불놀이·고누두기·공기받기·자치기 놀이 등이 전승


민요

멸치잡는 챗배에서 부르는 〈챗배노래〉
<떡타령〉·〈큰애기노래〉 〈모심기노래〉·
〈모찌기노래〉〈밭매기노래〉〈농부가〉
〈베틀노래〉〈장기타령〉〈화투타령〉〈상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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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 마한 세력이 안주할 만한 곳은 제주도.
마한세력이 재기의 터전을 삼을 곳도 제주도.
삼한시대로 세월을 거슬러 탐라국으로 가 보자.




탐라국.




제주도의 옛 나라 이름. 주호(州胡)·탐모라국.
섭라(涉羅) 담라(담羅)·탁라(탁羅)라로도 표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고려 및 이조 초기까지 칭호.

탐라국은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3신인(三神人)이 모흥혈에서 용출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신당서에 의하면 키가 작고, 개나 돼지 가죽으로 만든 의복.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 초옥에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 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

1928년 제주시에서 오수전(五銖錢)과 화천(貨泉)·
동경 등 중국 신나라 화폐와 거울이 발굴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고을나 15대손 3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신라에 조공.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주, 왕자 도내' 작호를 하사.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탐라는 '섬나라' 라는 의미.

탐라국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 무렵.
그 이전까지는 3성 씨족의 공동연맹체제인 듯.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을 무렵 고씨(高氏)가 왕.

476년 탐라국은 백제 문주왕 2년 4월에 조공을 받쳤다.
백제왕은 탐라국 사신에게 좌평(佐平) 관등을 수여했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탐라가 조공을 받치지 않아
동성왕이 탐라 정벌에 나서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했다.
고구려와 국교는 없었고 백제에 복속될 때까지 교역 성행.

한편 신라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이 항복.
이때부터 신라 속국이 되었고 탐라는 일본과 가깝게 교류.
678년에 신라로부터 경고를 받고나서는 신라 일변도 국교.

한편 신라 3국통일후 661년 탐라왕은 당나라에 사신 파견.
661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사신이 탄 배가 풍랑
탐라국에 대피하자 탐라 왕자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행.

그후 일본과 매우 교섭이 활발했다.
탐라 왕자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
680년과 686년 일본사신이 탐라 방문.

신라 말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고려와 우호관계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938년 고려 후삼국 통일후 고려에 탐라국 태자를 파견.

고려는 신라의 예를 따라 성주 왕자의 작위를 수여.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 번국(蕃國)으로 독립적인 체제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 1개 군으로 개편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으로 된 뒤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에 의하여 행정 업무를 관장
탐라국 성주와 왕자는 관직만 남아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지

이조 건국 후 1404년(태종 4)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
1445년(세종 27) 이것마저 폐지되어 완전 평민화.


.....................제주도 역사의 기원.........................
아득한 옛날, 한라산 북녘 삼성혈에서 솟은 3 신인.
첫째는 고을나, 둘째는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 3인.
세 사람은 비범한 생김새에 가죽옷을 입고 육식 위주

사냥을 일삼아 가정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날.

한라산에서 동해를 바라보니, 해변에 자줏빛 나무상자.
3 신인이 산에서 내려와 안개에 싸인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푸른 옷을 곱게 차려입은 선녀같은 처녀가 셋.

나이는 십오륙 세쯤 되고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다.
기품은 그윽하였고 얌전하게 앉아 각자 화장하고 있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 등등이 있었다.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

3 신인이 반기자 옥함 속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기를,

"저는 동해 벽랑국에서 온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오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어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라.
임금님께오서 말씀 하셨으니 혼례를 치르시고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그 사자가 승천하며 남긴 백마 발자국이 온평리.. <황루알>'


삼신인은 제물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 후 혼례
물맑고 비옥한 곳으로 활을 쏘아 영역 결정.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이 '활쏜디왓'
제주시 화북동 지방기념물인 <삼사석>.

활을 쏘아 고을나가 정한 주거지는 <일도>.
양을나 주거지 <이도>., 부을나 주거지 <삼도>.
그후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탐라국을 이루었다.

석기시대 유물 타제석기 골각기 등이 출토된 동굴.

인간이 제일 먼저 만들었을 원시적인 도구로 보아 구석기시대.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일본 한반도 등등 동북아시아 공통적 유물.
특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 412 호)를 비롯하여
탐라국 형성기 대단위 집자리 236기 (원형 173기)

당시 석축담장, 쓰레기장, 마을 도랑 유구가 출토된 곳
주거지에서 토기(구멍띠토기, 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석기(돌도끼, 대패, 갈돌, 숯돌) 와 철기 (철제도끼, 손칼),
청동기(동검, 검파두식 등), 곡식(콩,보리 등) 다양한 유물들.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송국리 유형의 문화말기
그 과정과 단계를 보여주는 국내 최대규모 유적지

동시에 탐라국 형성기의 제주 주민문화를 알리는
국내 유일의 마을 흔적이기도 한 중요 유적지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동북아시아 마을 유적의 흐름
그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

제주 삼양동 선사유적 (사적 제 416호)를 살펴보면
제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도 있을 듯 보인다.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과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제주 전역에 분포된 청동기, 철기유물,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의 귀중한 자료들은 제주의 역사를 알게 해준다.

제주도 옛 이름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등이다.

옛 이름 중에서 '동영주'만 제외하고는 모두
<섬나라>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지명이다.

제주도 개벽신화 = <삼성혈과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여기에 관해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온다.

삼성혈에서는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낸다.
삼성(三姓)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는 삼신인(三神人)이 있다.
모흥혈(현재 삼성혈)에서 나와 가죽 옷을 입고 사냥하며 살았단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삼 공주와 혼례를 올렸다.
삼공주는 오곡씨앗, 송아지, 망아지 등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왔다.
삼공주가 제주도 동쪽 해상에서 들어올 당시에 갖고 왔던 오곡 씨앗.

그것으로 농사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삼신인의 주거지를 정하려 쏜 화살이 꽂혔다는 삼사석
현재 제주도 문화재로 남아있는 삼사석은 두 전설의 공통점.

그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하여 '탐라국'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고 역사기록에 있다.

1105년 고려에 예속되어 탐라군이 되었으나,
왕통은 그대로 존속하여 통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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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연혁.


상고시대∼삼국시대......탐라 (탁라)국
938년 (고려태조 21년)..탐라국 태자 고말로, 고려입조
1105년 (고려숙종10년)..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고려 고종(1192∼1259)..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 (충열왕 원년).....탐라국으로 회복,총관부 설치

1294년 (충열왕 20년).....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 (태조년대)..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 (태종 16년)........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1864년 (고종 1년).........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 (고종 32년)........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 (광무 10년)........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 (융희 4년).........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 (일제시대)..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도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81년 7월 1일.............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
1997년 (현재)...............2시·2군·7읍·5면·31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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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유래 및 전설...................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한라산(해발 1950m)
'은하수 (漢)'를 손에 '잡을(拏)' 듯 높은 산(山)'.

태평양 바다 기압골이 봉우리에 걸려 운무에 쌓인 백록담(白鹿潭)
능선 둘레 약 1.7㎞이며 화구호 깊이는 110여m 이고 넓이 약 6만평.
백록담은 '흰 사슴이 살았다는 호수'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흰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데
빗나간 화살이 자기 궁둥이에 맞자 화가 났던 옥항상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사냥꾼에게 던졌는데 그것도 빗나가
바닷가로 날아가 산방 산이 되었고 봉우리 뽑힌 자리는 백록담.

산방 산은 75만년 전., 백록담은 2만 5천년 전., 바다에서 솟았다.
지질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록담의 생성역사는 의외로 짧다.
즉, 제주도 일대는 서해 저지대의 일부분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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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지리상으로 구석기시대 남해 저지대에서의 중심지.
제주도는 제 4 빙하기 이후 대홍수 당시의 피난처.


..................백록담의 유래 및 전설..........................
옥황상제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산지기 산신령이 관리.
그곳 정상 호수는 선녀들이 목욕하는 동안은 금남의 성역.
어느 날 선녀들 목욕 끝날 시간에 맞춰 그곳에 갔던 산신령.

그곳에 혼자 남아 목욕하는 선녀 미모에 넋 잃고 사랑에 빠짐.
그후부터 그 선녀가 목욕할 때면 훔쳐보며 홀로 애태운 산신령.
옥황상제 노여움을 산 산신령은 그 벌을 받아 흰 사슴이 되었다.

흰 사슴이 된 산신령은 그후에도 늘 그 호수 가를 맴돌며
오지 않는 선녀를 기다리다가 사냥꾼 화살에 맞아 숨졌다.

흰사슴이 죽어가며 흘린 피자국마다 분화구 진달래 꽃 되어
그 혼이 해마다 그리움 호소하듯 5월이면 피어난다고 하는데
그 흰 사슴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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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유래 및 전설을 보면 남방 불교의 배경무대.
목욕하는 선녀들과 옥황상제 전설은 남방불교의 특징
제주도는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중간 기착지.

제주도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세력은 무역상인들.

마한의 잔여세력은 무장 무역상인들의 집단 중 하나
마한의 큰 세력은 제주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목선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갔던 벽랑국.

'역사 기록은 없지만 마한 패망세력이 아닐까?'

제주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
탐라국이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한 기록.
백제에게 패망한 마한이 의지할 나라는 신라 뿐.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신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왔다는 역사 기록.

패망 마한세력은 탐라국에 합류한 후,
탐라국과 함께 신라에 입조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