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4. ( 내원골. 정순덕 여인. 선녀굴. 송대마을. 진달래꽃.)

donkyhote 2007. 10. 9. 14:29



내원골



대대로 자연의 섭리만 쫓아 살아오던 지리산 기슭 주민들
지리산의 마지막 비극이길 바랐던 1948년10월 여순 반란사건.
구례 왕시루봉 서쪽 문수리 계곡에서 국군토벌대와 한판 싸움

그러나,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고
6.25 이후 1963년까지 십수년간 이어졌다.

아늑한 어머니의 품속처럼 고요하고 포근했던 내원골
6.25를 전후하여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현장으로 돌변
격변하는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내원골

1945년 8.15 광복이란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으며 시작된 지리산의 비극
특히, 내원골은 지리산의 비극이 종지부를 찍은 곳.

내원골에서도 가장 깊은 안내원에서 태어난 정순덕
1950년 16세 어린 나이로 시천면 사리로 시집을 간다.
17세 신랑은 6.25이후 마을을 점령한 공산군에게 부역

국군이 다시 덕산 일원을 탈환하자 부역한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신혼 6개월 앳된 신부도 뒤따라간다.
칠흑 같은 겨울밤, 남편 옷을 챙겨 산으로 들어간., 정순덕.

남편과 상봉한지 20여일 만에 남편을 잃은 정순덕.
그로부터 13년 세월을 짐승처럼 살아야만 했던 그녀.
李洪伊와 함께 그녀가 경찰에 붙잡힌 1963년 12월 11일

그날 상오1시 즈음 자신이 태어난 내원골에서 잡힌 그녀.
당시 내원마을에서 보름간 잠복근무를 하던 산청 경찰 2인.
이홍이는 현장에서 사살됐고, 정순덕은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내원골(안내원)에는 그녀가 살던 집과
그녀가 생포됐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태어난 집은 송두리째 흔적이 없고 집터만 남아 있으며
살던 집은 지금 이 마을에 사는 성한술이라는 사람이 관리

그녀가 이홍이와 마지막으로 저항하다 생포된 집은
안내원마을 유일한 가게 집 뒤편에 창고로 쓰여진다.

이 마을에서 살다가 전란 와중에 다른 곳으로 가서 살다
다시 15년 전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다는 김재용씨(75)는
정순덕이 살던 집과 태어난 곳, 생포된 장소를 아직도 기억

당시의 기억이 너무도 끔찍해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말한다.
네 가구가 사는 안내원마을은 관광지로 겨우 각광받고 있다.
내원사에서 바깥 내원마을 지나 배양이, 안내원마을까지 도로

"외탑이" "쌍탑이" "큰 절골" "작은 절골" 등의 지명

국사봉으로 이어진 안내원마을은 고산지대의 이색적 분지
옛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며 근대 빨치산들의 활동무대
지금부터 그곳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씩 들춰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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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 내원궁에서 유래된 지명., 내원골.
부처가 도솔천에 왕생한다는 불교 신앙관.
미륵사상은 2~3세기 경 인도에서부터 유래.

부처가 56억 7천만년 후 도래한다는 도솔천.
도솔천에서의 하루는 인간 세계에서 약 4백년.

'400년 X 365일' = 도솔천에서의 1년.
도솔천에서 4000년을 머물렀다는 부처.
하여, 산출된 56억 7천만년이라는 세월.

사회 혼란기의 빈곤과 학정에 시달린 민중들.
하루가 지옥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던 민중들
도솔천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정착했던 내원골.

1950년 6,25 전후 사상전에 휘말린 내원골.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은 쑥대밭이 되고만다.
아직도 반란의 역사 흔적들이 물씬한 내원골.

피서철에는 물놀이 인파가 붐비는 내원골.

내원골 개울가에서 남해 사천 푸짐한 회 파티.
특히, 전어 축제 무렵에 푸짐한 된장 상추쌈 회.
부산 해운대에서도 피서철에는 이곳을 찾을 정도.

피서철이 지나면 인적이 드문 내원골.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골' 이라 불리우는 내원골.
여우골이란 전국 어디를 가도 인적이 드문 외딴 곳.
정순덕 여인을 포함한 마지막 남부군 3인의 항전처.

하여, 내원골은 '구미호 골'이라 하는 것일까?

구곡산 아홉 능선이 뻗어내려와 멈춘 명당터 내원사
구미호 골은 신출귀몰한 정순덕 일행을 뜻하는 별칭.
마지막 빨치산들로 최후의 순간까지도 처절하게 투쟁.

그 반란의 역사가 아직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내원골.
1950년부터 1963년까지 남부군들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
안내원마을은 아직도 그 비극적인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다.

'정순덕 생가를 비롯한 안내원 마을 유적지.'

'지리산 남부군 완전소탕' 공식선포 시기로는 1955년 5월 23일.
그러나, 정순덕 외 2 명은 1963년 11월 무렵 그곳에서 붙잡혔다.
그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 산속에서 들짐승처럼 방황했었다.

1948년 10월 구례 왕시루봉 서쪽 문수골의 여순반란군.
토벌대와의 전투에서부터 시작돼 1963년까지 십수 년간
마지막 남부군 3인 소탕으로 지리산 반란의 역사는 종말.

'마지막 빨치산' 남장 여공비로 불렸던 정순덕 여인.

빨치산으로 남다른 악명을 떨치다 사살된 이홍이.
1963. 12. 11. 새벽 1시,내원골에 잠복했던 박기덕.
산청경찰서 대공경찰 박기덕씨, 삼장지서장 김영국씨

두 경찰관은 보름간 잠복 끝에 두 빨치산을 향해 총격
이홍이 현장사살, 정순덕 여인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
그 후 정순덕 여인은 진주지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마지막 빨치산으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던 정순덕 여인.
반면, 정순덕을 생포했던 박기덕씨는 오랜 병마에 사경.
각계 성금으로 진주 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한다.

그러나, 정순덕 여인은 단행본까지 낸 각종 여론의 주인공
전직 대공경찰관 친목단체인 한록회 진주지회 회원들은 분노.
각계에 진정서를 내며 반발해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대변했다.

'반란의 역사' 주인공들에 대한 역사의 엇갈린 평가

반란의 역사 평가는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필요할듯.
그러나, 정순덕 여인의 삶의 역경은 너무 기구한 운명
이제 그녀의 생가이자 붙잡혔던 안내원 마을은 관광지.

안내원 마을 도로를 따라 해발 800m 국사봉까지.

내원사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갈 수 있다.
내원골은 고산지대에서 보기 드문 분지가 이색적이며
옛 불교문화의 유적지이자 마지막 남부군들의 활동무대

지리산 내원골은 아직도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한 모습이다.
마른 숲이 스산했을 그 당시 비극을 말해 주는 듯한, 진달래 꽃.
그 혼들은 못 다한 삶의 아쉬움을 호소하 듯, 피빛으로 피어난다.

잡목 숲이 무성하게 뒤덮인, 그 옛날 빨치산들의 생가와 살던 집.
그들이 붙잡혔던 장소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내원골.
초라하고 처참한 당시의 흔적들을 내원골은 그대로 부여 안고 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낡은 이데올로기'
지금은 지구촌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겉보기엔 변함이 없는 듯한.. 내원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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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바깥 내원마을을 지나 배양이 마을, 안내원 마을들.
도로 따라 주변에 집을 짓고 단장하는 모습은 개발의 전주곡
2005년 6월 현재 별장 지대로 변모했다는 현지소식이 안타깝다.

'외탑이, 쌍탑이, 큰절골, 작은 절골, 등등의 지명.'
이곳은 통일신라 화랑들의 수련장 임을 대변해준다.
아울러, 미륵신앙에 나오는 도솔천같은 현세의 이상향

내원골은 신라시대 호국불교 화랑들의 심신 수련장

장당골과 갈라지는 내원사 왼쪽 도로를 따라 계속되는 내원골.
지리산 마지막 남부군이 잡힌 곳이며 암자가 10 여개나 있는 곳.
내원골에 있는 마을은 바깥 내원마을과 안내원마을 둘로 나뉜다.

'불교의 미륵사상 도솔천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들.'

동학혁명 당시 농민들이 이상향을 꿈꾸며 화전을 일궜던 마을.
국사봉으로 이어진 해발 8백m 안내원마을까지 승용차로 접근 可.
내원골은 세련된 경치는 없지만 고산에서 보기드문 분지가 이색적.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중봉으로부터 천왕봉에 이르는 한가운데 위치
계곡의 양 축을 이루는 내원골과 장당골 길이 만.., 100 여 리에 가깝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내원사계곡은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 들머리 지점.

오늘날과 같이 중산리나 대원사까지 차가 들어가지 못하던 시절에는
산청군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이 종점이었기에 덕산에서부터 걷기 시작.
대포리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해야 했고 당시에는 등산장비도 없던 시절.

지게 짐 무계만 50 kg이 넘었고,
된장독 지고 오르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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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코스 : 대포리 - 내원사 - 내원골
또는 장당골 - 순두류 - 법계사 -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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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그고 땀을 식혀가며
천왕봉을 다녀오는데 예전에는 3~4 일 소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이던 산행 코스.

내원사 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 내원골과 장당골 갈림길.
내원사 규모는 작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람다운 고찰.

내원사를 한 바퀴 돌아 대나무 숲으로 가면, <내원마을 가는 길>.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는 반면 내원골에는 바깥내원과 안내원마을.
<경상대 자연학습장>이 있는 장당골은 예전의 화전민촌 모두 다 철거.

내원마을 특산물은 곶감과 복조리, 워낙 고산지대라 공기도 맑다.
이곳 주민들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곶감깎고 복조리 만드는 것이 일.
'반란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1948년 10월 전라도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 진압군들의 반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기며 시작되었던 빨치산 역사.
지리산에서는 구례 문수골에서 시작, 내원골에서 마감된, 반란의 역사.
1950.6·.25~1955. 5월 빨치산이 섬멸될 때까지 7년간 접근 금지된 마을.

소개령 이후 원주민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그들이 떠난 빈자리엔 객지인들이 찾이하고 있을 뿐.

'반란의 역사' 산증인들은 고령으로 희미한 옛 기억을 상실.
생존에 있는 산증인조차 거의 역사의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
지금은 아쉽게도 반란의 역사 현장들이 전설처럼 잊혀져간다.

 

 

 

 

 

 

정순덕 여인.



조개골 내원골 일대는 빨치산 최후의 항전처.
빨치산 전용 방앗간이 있을 규모의 중요 거점.
법일스님이 50 년간 떠나지 않았던 대원사계곡.

'내원골 초입은 정순덕 여인의 체포 현장.'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유격부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 정예부대.
노고단에서 내원골까지 토벌군을 포함 사망자만 2 만명.

'정순덕 여인 체포로 막을 내린, 반란의 역사.'

제주 4.3 민중항쟁 진압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국군.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항쟁 진압 거부.
반란군이 된 여수 14연대가 지리산 문수골로 쫓기며 남부군.

그 반란을 이용해 지리산을 적화기지로 이용한 공산당.
그들을 진압하려 군경연합으로 지리산에 투입된 토벌군.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주민들은 그 틈새에서 방황.

1955년 5월 23일.
남부군 소탕 완료.

그전까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주민들.
밤낮으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이
생명과 맞바꾸어 지는 일로 직결.
지리산 주변 주민들이 겪었던 고초.

1949년 9월에서 12월 사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 여 주민들이 몰살당한 사건.

좌익 혐의로 덕산 농업 창고에 수용되어
토벌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차례로 총살.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 명
경남 사천군 새동 공동묘지에서 총살.

1951년 '산청 함양 주민 대학살사건'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이다.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랬었는지
자세한 사연조차 알 수 없는 사건들.

중군리 구진벌, 군자리 앞산,
시천면 신천국민학교, 경호강변.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에서
산골주민들이 집단 총살 당한 사건들.

1951. 3. 12.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 골짜기에서 500 여명 주민들.
토벌군에 의해서 총살 당한 산골 주민들

남부군에 의해 숨진 주민들
비슷한 숫자였을듯 추정된다.

어느 편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산으로 들어갔던 주민들.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따라서
가장을 따라 산에 올랐던 남은 가족들.

남북간 사상전에 휘말려 죄없이 죽어갔다.
지리산 속을 방황하며 병들거나 굶어 죽고,
토벌군에게 총맞아 죽고, 얼어 죽기도 했다.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도
그런 산골마을의 평범한 새색씨.
사상과 이념을 떠나 되새겨 본다.

그녀는 어찌하다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었을까?
여자 몸으로 무슨 사연이 있어 남부군이 되었을까?
하여, 그녀의 진술기록을 찾아 그 내용을 소개한다.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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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덕 여인의 진술 내용을 읽다가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길을 걸었을 듯.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도망다녔던 남부군들의 최후.

결국, 공산주의에 이용 당하고, 버림 받고, ?捐꽁求鳴? 죽어갔다.
이제는 그 백골들이 진토가 되어 지리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법일스님은 그 영혼들을 달래려고 대원사를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국사봉 가는길' 내원골은 남부군 정순덕 여인의 관광 코스.
국사봉은 옛날 봉화를 올렸던 산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불렀다.
마을을 재앙에서 지키려고 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것이 국사당.

따라서, 천제단 또는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국사당.
몽골 '오보' 신앙이 한반도에서 산신신앙과 결합한 흔적.
거기에 고대중국 '성황'신앙이 들어와 기능과 명칭이 복합

국사당은 옛부터 속칭 고갯마루 서낭당이라고도 불리워왔다.
국사봉 지명은 원나라에 80년 간 지배받았던 고려 시대 흔적.
국사봉이란 지명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남아있다.

산청군은 몽골의 고원과 같아 고대 북방 유목민 풍습이 많다.
산청군 일대는 한반도 고대국가 간에 전란이 빈번했던 격전지.
하여, 국사봉은 마을 재앙이 유난히 많았던 고갯마루를 뜻한다.

'13년간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이 버틴 <내원골>.'

17 살 신랑은 결혼 직후 6.25가 터지자 공산군 수중에서 부역.
국군이 덕산을 탈환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피했고
신혼 새색씨 그녀는 그해 겨울 밤, 남편 찾아 지리산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16 살 어린 신부에겐 가시밭길 인생 역경이 시작된다.
지리산에서 남편과 함께 지낸지 불과 20 여일 만에 다시 헤어진다.
내원골 안내원 마을엔 그녀가 살았던 집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천왕봉-중봉-써레봉-국사봉-구곡산(961m) = 황금(동남부)능선.
30km 능선의 초원지대가 가을엔 황금빛으로 물들어 붙여진 이름.
덕산 뒷산인 구곡산까지 이어진 써레봉-중봉-천왕봉 구간은 20km.

써레봉은 등산로가 미로와도 같아 길찾기가 어려워 등산객이 드물다.
국사봉은 안내원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 큰 절골, 작은 절골로 나뉜다.
그녀가 태어나 남부군이 되어 붙잡힌 순간까지의 마지막 활동무대이다.

1960년까지 순두류를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
봉화대 역할을 한 남부군 활약무대였고 지휘부대가 있던 곳.
깊은 산중이면서도 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절묘한 은신처.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한, 정순덕 여인.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17세 성석조씨와 16세에 결혼.
1950년 결혼 직후 6. 25 동란에 공산당에게 남편은 6개월간 부역.
1951년 1.4 후퇴 후 국군이 탈환하자 남편 따라 지리산에 들어감.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1952년 남편 전사).
1953년 남부군 노영호 부대에 편입하여 거점을 덕유산으로 옮김.
1963년 산청군 내원골에서 국사봉 거점으로 남부군 활동 중 체포.
1963년 11월 체포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고 한쪽 다리를 절단.

1985년 8월 15일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후 가석방.
1988년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다가.. 자립하기 위해서 나옴.
1995년까지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1995년 비전향 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 만남의 집 ’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 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을 촉구했지만 무산되었다.
2004년 4월 1일 운명후 통일로 길목인 파주 보광사에서 영결식.

정순덕 여인의 비화는 생전처럼 사후에도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듯..
16세 새색시, 18세 대성골 불바다 속 5일 사투 끝 기적 생존, 72세 타계.


초혼. - 김소월 作.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속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선녀굴.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뒷산에 위치한 선녀굴
정순덕 여인이 20대 청춘을 숨어살며 보낸 곳.
당시 수색작전에 참여한 분들과 목격자들 증언.

마천, 추성, 송대, 남호, 동강, 문정 주민들 구전.

지리산은 남부지방에서 가장 일찍 첫눈이 내린다.
단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왕봉 주위에는 하얀 눈
겨울이 일찌기 찾아오고 봄은 제일 늦게 찾아오는 곳.

'1962년 2월 겨울이 한창이었던 마천 추성골.'

칠선계곡 쪽에서는 천왕봉 아래 희끗희끗 쌓인 눈.
추성리에서 바라보면 겨울이 지나가기엔 아직도 요원
사찰(유격대) 경찰들은 칼빈 소총의 잠금 장치를 한 채
흙으로 채운 마대로 쌓은 토치카 안에서 지루한 하루 하루.

19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된 빨치산들은 다시 지리산으로 집결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경찰의 소탕작전은 1955년 후반부터 1956년까지 실시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빨치산 부대들이 소멸.

이현상이가 빗점골에서 사살되고 그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거의 사라졌다
당국이 공식선포한 시기는 1955년 5월 23일.

그러나, 1956년 말까지,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
1953년 7월 휴전 후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활동
당국에서는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사찰 경찰을 임명
향토 방위 또는 빨치산 소탕 작전 때엔 도우미 역할

문영만과 지동식은 이런 사찰 경찰로서
추성리 빨치산 신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마천 지서의 지시에 따라 무한정 경계 근무

가끔은 칼빈 소총으로 몰래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벌목꾼이나 숯꾼들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고 부수입.
향토 방위대 소집권한도 부여받아 제법 괜찮은 위치.

고사리나 산채를 채취하러 가는 주민들을
빨치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감시
관솔(소나무 기름이 엉긴 나무) 채취 허가권.

몇년 동안 이렇다 할 전투하나 치루지 못하고
기약 없는 방위 임무만 부여받은 채 하루 하루
어느날 추성골에서 곰을 보았다는 나무꾼의 제보

몇 달 동안 뜸했던 곰 사냥 생각이 간절했다.
꼭 곰이 아니라도 송아지 만한 노루사냥 계획
추성골 석이버섯 전문 채취꾼 허정갑을 안내자

18세의 기골 장대한 허정갑에게는 대나무 죽창
세 사람은 벽송사 뒤쪽 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빨치산이 숨을 곳을 없애려 불을 질러 온통 민둥산

약초꾼들이나 나무꾼들이 오르내리던 길목이지만
빨치산들의 출몰 위험 때문에 다져 있지 않은 산길.
정순덕 일행이 언제 집중사격할지 모른다는 강박의식

그들은 선녀굴을 거쳐 독바위 넘어 쑥밭재로 갈 계획.
마천 지서에는 빨치산 수색작전이라고 변명을 할 요량
북서쪽 능선에는 쌓인 눈위에 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

아직도 지리산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는 정순덕

눈위의 발자국으로 추적하기에 아주 용이하다는 계산
신출귀몰한 정순덕 여인을 잡거나 사살하면 큰 보상금
평생 행복을 보장받을 만큼 거액이 눈앞에서 오락 가락.

산 능선을 두어 시간을 올랐을 때
개가 발버둥을 치며 낑낑대기 시작.
문영만은 사냥개 목줄을 풀어 주었다.

무엇인가 냄새맡은듯 선녀굴로 달려가는 사냥개
두 사람은 선녀굴을 향해 카빈 총구를 겨냥했다.
6.25 무렵에는 약 2만 빨치산들과 군경찰 토벌대

지리산에서 활개치며 양민들을 참 많이도 괴롭혔다.
젊은이들에게 보급투쟁 명목으로 약탈한 생필품 운반.
공산당 세뇌 교육을 시켜 빨치산 부대로 편입하곤 했다.

빨치산이 가장 많이 출몰하였던 마천 지역

경찰의 힘으론 그네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어서
마을 청년들로 향토 방위대를 조직해 빨치산과 대적
향토 방위대와 빨치산의 첫전투는 독바위 아래 노장대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향토 방위대
빨치산들은 여러번 마천 지서 습격사건,
면소재지 당벌마을을 습격한 빨치산 공세

함양 빨치산 주요거점은 노장대 신밭골 쑥밭재
산청 빨치산 부대와 정보교환을 할 때는 사립재
주요 지시사항이나 공격목표, 부대사항등 정보교환

특히, 독바위 인근 '천연의 요새' 선녀굴을 위시해서,
노장대 마을 위쪽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 등 은신처.
눈비 또는 한겨울 칼바람을 피하기엔 아주 적당한 장소

많은 빨치산들이 살다시피 했던 곳이 선녀굴 근처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이어 고막을 찢어낼 듯한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
총소리와 함께 개짖는 소리도 동시에 뚝 끊어졌다.

세 사람의 이마에서 땀이 송송 맺혀지기 시작했다.
그 칼빈 총소리는 분명 공비의 소행이라 확신한 탓.
잠시후 선녀굴 가파른 바위위에 물체가 어른거렸다.

문영만과 지동식의 카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바위 위 검은 물체가 아?≤各막? 굴러 떨어졌다.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린 물체는 분명 사람 같았다.

선녀굴 바위에 총알이 튀며 불꽃이 팽팽 돌았다.
안내자인 허정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 사람의 등에서는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올랐다.

엎드려 쏴 자세로 약 30분이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인가 총맞고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선녀굴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겁이 났다.

짙은 산그림자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주변에서는 억새와 싸릿대를 스치는 바람소리.
공비들이 자리를 옮겨 공격할 것만 같은 불안감

세 사람은 선녀굴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듯 도망쳤다.
산죽 비트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몇년 간 조용했던 선녀굴의 인근에서 요란한 총소리
우남마을, 세동마을, 송대마을 추성마을, 광아리 마을
등지에서는 주민들이 불안감에 몸들 바를 모르고 있었다.

선녀굴로부터 약 2km 아래에 위치한 송대 마을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알수 없는 불안감
그날 문영만과 지동식은 공비사살 사실을 신고.

이미 날은 저물었기에 다음날 새벽에 비상 총출동
선녀굴 주변지역 수색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 김희준, 이은조, 이홍희, 지동선,
이용순, 이재봉,정순덕이 뭉쳐 다니다가
김희준, 지동선은 1954년 10월쯤 사살되고,
정순덕 이은조, 이홍희가 지리산을 헤멘다더라. "

" 전쟁이 끝난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빨갱이 놈들이 지리산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

" 정순덕 이은조 이홍이 이 세 놈 뿐입니더.
셋만 잡으면 더 이상 빨 갱이가 없는기라예 "

만약 정순덕을 사살했다면
보상금이 다른 빨치산 보다
훨씬 더 비싸다고 알고있었다.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성석조씨와 열 여섯에 결혼
남편은 마을에 진주했던 인민군에게 포섭 당해 빨치산

그해 9월 그녀는 남편을 찾아 지리산 도장골로 입산.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
1952년 대성골 전투에서 남편의 전사를 확인하게 되고,

1953년 노영호 부대에 편입되어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 괘관산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활동무대

'정순덕 여인의 본명은 호적 상으로는 정순점.'

1950년대 삼장면 내원골은 지리산 오지 중 오지.
당시 17살이면 요즘 여고 1학년 수준의 정신 연령.
당시 지리산 주민들은 공산군이 들어오면 그들을 환영

국군이 들어오면 반기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빨치산에 포섭 될 수 밖에 없었고
경찰들은 그 가족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했으리라.

남편이 그리워 정순덕은 결국 산으로 들어갔고
그녀도 진양군 유격대 일원 빨치산이 되고 만다.

나중에 남편이 대성골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빨갱이보다 더 열렬한 빨갱이가 되어 버렸던 그녀.
6.25 전란 중에는 좌익과 우익 둘 중 하나를 선택

그녀의 남편 성석조는 우익을 선택할 권한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좌익의 편에 선택되어졌던 남편의 운명
정순덕의 운명도 함께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비극

" 햐! 그놈들! 지독한 놈들이제.
쏙밭재나 신밭골 근처 목기 나무꾼들 움막집
선녀굴, 독 바위 밑의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

겨울엔 납작한 돌에다가 불을 지펴 달군 후에
모포로 감싸 깔고자면서 겨울를 견뎌 낸다더군.
정순덕이가 선녀굴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카던데. "

선녀굴 입구는 작은데 그 안은 살림해도 될 공간.
" 그런데 12년 동안 산속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

" 가을에 벼이삭을 훑어 큰 소주병에 저장했다가
긴 꼬챙이로 한나절 내내 비벼 대면 한 주 먹의 쌀
소금 간을 해서 죽도 해먹고, 밤 버섯을 볶아도 먹고,

보리에 쌀을 섞은 주먹밥을 소금에 찍어 먹기도 하구,
송이버섯, 두릅, 더덕, 때로는 곰이나 산돼지를 사냥
6.25가 끝날 무렵 동네에서 식량을 많이도 빼앗아 갔지.

그 놈들은 쌀이나 고기를 절대 지고가지 않고
동네 젊은이들에게 강제로 짐꾼 노릇을 시켰지."

수색대는 칼빈 총을 든 사찰 경찰과 경찰들은 앞장
나머지 대원은 멀찌감치 뒤따르며 선녀굴 근처를 수색
마침내 총에 맞아 숨진 사냥개 한마리의 시체를 찾았다.

순간 대원들은 개가 있는 주변으로 우르르 모였다.
선녀굴 입구에는 바위 틈새에서 나오는 샘물이 있다.
6.25 전후에는 선녀굴이 빨치산 소굴이나 다름 없었다.

산불에 타다 남은 나무 뿌리와 삭정이가 있고
그 아래 시커멓게 그을린 개가 쳐박혀 있었다.
선녀굴에서 능선 하나 사이에 가깝게 '독바위'

그 바위 위에 올라서면 엄천강은 물론 함양읍과
멀리 왕산과 산청 주변까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수색대는 독바위를 뒤로하고 배바위 주변을 수색
더 아래로 내려와 망바위 위에 서서 주변을 탐색
노장대 근처의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까지 수색.

지리산에서 찾아보기가 힘든 박쥐 떼를
노장대 근처 박쥐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빨치산들이 몇년간 기거하면서 불을 피워
박쥐가 사라졌다가 박쥐굴에는 다시 박쥐떼
동굴 천장에 더덕 더덕 붙어 오수를 즐기는듯.

6.25 이전에는 숯 꾼들의 움막터나 목기 생산지.
6. 25 이전엔 27가구까지 살았다는 노장대 마을
빨치산 때문에 소개령에 의해 주변 마을로 분산

'우남, 세동, 송대, 동강, 운서, 모전 마을'

지친 수색대들은 선녀굴 동굴 입구의 샘물을 들이켰다.
보상금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문영만 지동식 허정갑
마을까지 내려올 동안에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앞서 내려가던 마을 향토 방위대 대원들의 불평 불만.
뒷쪽 3 사람에게 연거푸 들려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962년 2월까지 선녀굴 일원에서 숨어살던 정순덕 여인.

1963년 11월에 산청군 내원골에서 이홍이가 사살되고
대퇴부에 총맞고 생포된 정순덕이 증언한 내용을 보면
당시 선녀굴에서 사살된 빨치산은 '이은조'로 밝혀졌다.

그녀가 당시 이은조 시신을 땅속에 매장.
산청 등지의 산골을 전전하며 숨어산 것.

빨치산 소탕 작전이 수없이 전개될 때마다
산청, 남원, 함양 쪽 지리산을 오고 가면서
1962년 2월까지 들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그녀.

1963년 11월에 산청의 내원골에서 생포되고,
비전향 장기수로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된다.

2004년 4월 1일 파란만장하던 일생을 마감한 그녀.
20대 꽃다운 나이를 거의 선녀굴에서 보낸 정순덕.
휴천면 송전리 송대 마을 뒷산 선녀굴에 얽힌 비화 


 

임천강변  도로따라 견불사 방향

초입지 가는 중 지리산 와불 모습.

 

 

 

견불산 입구 임천강에 용담정

 

 

 

용담정 안 거북이

 

 

 

견불사을 지나 송대 마을 입구 이정표

 

 

 

송대 마을 입구

 

 

 

 

안내소 안에 전시 되어 있는 기록물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선녀굴 샘.

 

 

 송대 마을에서 벽송사로 가는 이정표

 

 

 

송대마을 초입에 날씨가 추워 얼음이 쌓여 있다..

 

빨치산 산죽 비트.

 

 

산죽 비트 지나면., 바위 비트.

 

 

밤에는 빨치산, 낮에는 국군이 장악했던.,독거촌 마을.

 

 

 

독거촌 마을 비트모습

 

 

 

 

선녀굴 비트장

 

 

 

 샘이 있어 빨치산이 활동할 수 있었던.,선녀굴.

 

 

 

선녀굴 안내판...

 

 

선녀굴에서 우측으로 가면 벽송사

왼쪽으로 가면 솔봉능선으로 가는데

솔봉능선으로 가면 노장대 전망바위 쪽.

 

 

 

노장대 표시기

 

 

노장대에서 와불상의 지리산 모습 전망,

 

 

노장대에서 욍산 방향의 조망

 

 

 

노장대 안내판.. 여기서 위로 올라 가면 하동 독바위.

 

 

 

노장대에서 바라본., 하동 독바위.

 

 


 

 

독바위에서 안락문 방향

 

 

 

 


송대마을. 



지금은, 함양에서 빨치산 관광코스로 개발.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선녀굴 코스
4㎞ 거리에 해발 900m라 3시간 이내 도보거리,

임천강변 5가구가 사는 송대마을이 들머리.

마을 위쪽에 12평 규모의 '지리산 빨치산 루트 안내소'
선녀굴 루트, 함양 5개 빨치산 루트와 빨치산의 활동상
자세히 설명해 주는 스크린 및 안내판, 산악 루트 모형도.

선비골로 10분 오르면,
빨치산 매복 산죽 비트

산죽 밭엔 빨치산 마네킹 2개이 따발총과 카빈소총을 겨눈 자세.
팔다리에 붉은 칠을 한 붕대를 감고 있는 초췌한 모습의 마네킹.
1949년부터 5년 동안 1만 717회에 걸친 교전에서 사망자 2 만명.

'산행깃점 송대마을에서 1시간 거리의 선녀굴.'

웅장한 기암 밑 샘에서 선녀가 목욕했다는 전설의 동굴.
1963년 2월 남로당 하동군 인민위원장 이은조 사살된 곳.
20 명이 앉을만한 화강암 동굴 입구에 여성 빨치산 마네킹.

굴 주변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총탄 흔적들.
마지막 남부군 3총사 '정순덕 外 2人'의 은닉처., 선녀굴.
여기서 1㎞ 오른쪽으로 떨어진 정상부의 독바위(노장대).

유두류록 첫날 밤 야영지 고열암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벽송사,마천면 추성마을로 이어지는 벽송사 루트가 나온다.
송대마을에서 출발하면 왕복 총 9㎞로 6시간 가량 소요된다.

속리산 문장대와 비슷하게 생긴 당당한 위풍의 독바위
지리산 동북부의 망루라 부를 만큼 주변 경관이 보인다.
천왕봉, 임천강, 경호강, 멀리 거창, 합천까지도 보인다.

동강마을, 운서, 운암마을, 망바위, 배바위, 독바위
일명, 노장대 루트는 5~ 6㎞로 5시간~ 7시간 소요.
<지름길은 5.35 km이고, 능선 길은 약 5.95 km 거리>

마천면 강청리, 인민군 총사령부 막사터, 두지터, 추성마을
5㎞ 구간은 백무동 루트로 3시간 소요되며 빨치산 루트이다.

하정마을, 영원사, 문수암, 군자마을 11㎞ 6시간 영원사 코스.
하정마을은 빨치산의 인민재판과 즉결 처형이 이뤄진 곳이다.
군자마을은 낮에 토벌대, 밤엔 빨치산에게 학살된 비극의 현장.

시천면 중산 관광단지 내 2층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빨치산, 토벌군의 유품 전시장, 내원사 계곡은 4개 빨치산 루트
이 일대가 치열했던 토벌군과 빨치산 간 격전장이었음을 말해준다.

 

 

 

진달래 꽃.


 


봄이면 우리나라 어느 산야를 가도 진달래꽃이 만발한다.
지리산에 연분홍 진달래꽃을 보면 정순덕 여인이 생각난다.
특히, 꽃샘추위 눈 내릴 때 진달래 꽃에 피어난, 눈꽃 고드름.

하얀 설원에 선혈의 흔적인듯 붉은 진달래 꽃
진달래 꽃몽우리 위에 피어난 백색의 눈꽃나라.
마치, 첫날밤 새색시 혈흔의 흔적 같은 아름다움.

'대원사에서 노고단까지 봄을 알리는 진달래꽃.'

빨치산 죄목으로 불타 죽은 혼들이 꽃으로 환생한 듯.
남북이 하나 되라는듯 핑크 빛으로 백두대간을 덮는다.
<한국 중국 둥베이 일본 몽골 우수리>는 진달래 자생지.

진달래 꽃은 4월의 봄 팔도강산을 붉게 불들이는 꽃.
일명 두견화라 하는 진달래꽃은 화전이나 두견주 재료.
화전은 애욕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씻어준다는 사찰 음식.

.........'애욕아,내 이제 너의 근본을 알았노라.'........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제자 아난다와 왕기사가 함께 걸식을 마치고 되돌아가는데
아름다운 여자가 왕기사를 보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웃었다.

왕기사가 부정관(不淨觀)으로 그 여자를 살피니
애욕이 자기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 왕기사가 깨달음을 얻어 게송으로 말했다.

"애욕아, 내 이제 너의 근본을 알았노라.
너는 다만 생각으로 생긴 것이거니
만약,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너는 나에게 없는 것이니라."

부처님께 돌아온 아난다와 왕기사는
그간 일을 게송으로 부처님께 말했다.

"육신(色)은 물방울과 같고
느낌(受 )은 물거품과 같으며
기억(想)은 아지랑이와 같고
의지(行)는 파초와도 같으며
의식(識)은 환상과 같나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텅 비고 고요해
진실로 참된 것이 없거늘
이 몸으로 인연하여 매달렸나이다.

이 몸이란 환상과 같은지라
내가 매달려야 할 실체가 없나니
이제 오온이란 것은 모두 덧없는 것임을 알아
애욕을 떨치고 다시 법안으로 돌아왔나이다."

부처는 왕기사의 게송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착하고 장하다. 왕기사여,
내가 보리수 아래에서 오온을 살펴보고 깨달았을 때
그대가 오늘 이해한 것과 같았었느니라." - <증일아함경>
...............................................................

'옛부터 불교와 관련깊은 듯한., 진달래꽃.'

'진달래꽃술은 100일 지나야 제 맛이 난다.'하여 백일주
한꺼번에 많이 마시기보다는 조금씩 마셔야 몸에 좋단다.
진달래꽃은 두견새가 토한 피에 물든 꽃이라 하여..'두견화'.

두견새 = 귀촉도, 망제혼, 소쩍새, 불여귀, 자규.

촉나라 임금 '두우'의 원통한 혼이 다시 환생한 새.
어느날 물에 빠져 떠내려 온 별령(鱉靈)을 구해준 왕.
하늘이 내린 인재라 여기고 정승을 삼아 국사를 맡겼다.

별령은 촉나라 대신을 모두 매수하여 심복으로 만들고
정권을 장악한 후 두우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하루 아침에 나라를 빼았긴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두우.

두견새로 환생하여 목에서 피가 나도록 밤새 울던 두우.
훗날 사람들은 그를 원조 또는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 (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고도 부른다.

진달래꽃은 보릿고개 굶주림을 달래주었던 간식.
보릿고개란 묵은 해 곡식이 떨어지는 음력 4~5월
보리가 여물기 전 농가에서 가장 식량이 귀한 시기.

춘궁기(春窮期) = 맥령기(麥嶺期) = 보릿고개.

농민들은 추수 때 소작료 빚 이자 세금을 갚고.
남은 식량으로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때 농민 대부분 풀뿌리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웠다.

걸식과 빚으로 연명하거나 유랑민 떠돌이가 된 농민들.
일제 치하, 8.15 해방 뒤 1950년대까지 겪은 보릿 고개.
꽃으로라도 허기를 달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하여 일명 참꽃.
진달래와 유사하지만 먹을 수 없는 꽃들은 개꽃.
진달래는 참 '진(眞)’자와 ‘달래’를 합친 합성어이다.

'나무꾼과 선녀' 전설에서 유래된 진달래꽃 이름.

..................진달래꽃 전설..............
하늘나라 옥황상제 꽃밭을 가꾸며 살던 선녀.
어느 봄날 지상에서 피어난 붉은 꽃을 발견한다.
선녀는 그 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넋을 잃고 만다.

"처음 보는 꽃인데 하늘나라에 심어야지."

선녀는 그 꽃을 뽑으려다가 땅으로 떨어져 다쳤다.
마침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나무꾼이 선녀를 발견.
다친 선녀를 집에 데려다가 정성껏 보살펴주어 회복.

'선녀와 나무꾼 사이에서 태어난 딸 달래.'

하늘나라 꽃밭 가꾸던 시절이 늘 그리웠던 선녀.
진달래 한뿌리를 캐어들고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그러나, 선녀를 사랑했던 나무꾼은 원망도 못한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간 뒤 남겨진 달래와 아버지.
달래는 나무꾼 아버지와 단둘이 산속에서 살았다.
달래를 키우며 부인을 향한 그리움을 잊은 나무꾼.

'선녀처럼 아름답기로 소문난 달래.'

원님이 정절을 탐하자 목숨을 끊은 달래.
딸마저 잃게되자 스스로 목숨 끊은 나무꾼.
그 이듬해 나무꾼 진씨 무덤에 핀.. 전설의 꽃.

댈래 혼백이 아버지를 위로하려 꽃으로 환생.
하여, 나무꾼 진씨 + 그 딸 이름 달래 = 진달래.

그후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참꽃.
참꽃은 나무꾼 진씨의 성에서 유래된 이름.
원래 진(陳)씨가 참 진(眞)으로 바뀌어 참꽃
.............................................................

참꽃은 먹을 수 있는 꽃이란 뜻의 이름.
향긋하고 새큼 달콤한 진달래꽃의 참 맛.
먹을 수 없는 개진달래는 개꽃이라고 한다.

'먹을 수 있는 꽃 중의 꽃' 진달래꽃.
첫사랑 그녀의 체취와 같은 진달래꽃.
입안에 그윽히 감도는 진달래꽃 뒷 맛.

진달래꽃을 한웅큼 흩뿌려 띄워놓은 막걸리.
그냥 바라만 봐도 입맛이 당길만큼 참 좋다.
특히, 산나물을 따서 넣고 비빈 진달래 꽃밥.

진달래가 질 무렵 피는 개진달래는 개꽃.
일명 물철쭉(개진달래), 철쭉은 모두 개꽃.
철쭉은 순결한 처녀의 혈흔 또는 순결의 상징.

진달래꽃은 진나라에서 들어온 유민들의 꽃.
이국만리 고향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꽃인듯.
진나라 유민들에게 향수병을 달래주던 진달래꽃.

진시황이 창건한 진나라는 티벳족이었고
초나라, 위나라, 정나라는 남방 묘족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에게 억압받던 민족들.

남방 묘족은 언덕에 올라 연인끼리 사랑.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
연인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 위한 행위.

'그 남방 묘족들에게 사랑받던 진달래꽃.'

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진시황
봉건제 폐지, 군현제 실시로 중앙집권체제 확립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제도 개혁

..............주.................
중국과 한반도 한자가 달라진 시기.
진나라의 문자 통일 이후로 보인다.

제 4빙하기후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
중국과 한반도 일본은 차츰 대륙에서 분리.
문자, 문화, 관습 등이 차츰 더 달라진듯.
......................................

진시황은 아방궁 건설 등에 3백만명의 노동 동원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 대공사를 감독케 한다.
그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다.

'과중한 조세 부담, 가혹한 형벌제도.'

진시황 폭정에 못이겨 자유를 찾아 탈출.
기원전 고향을 버리고 한반도로 이주한듯.
한반도에는 진달래꽃에 얽힌 전설이 참 많다.

................진달래꽃과 달래고개 전설................
충청도 금산 적벽 강가 인삼마을 인근의 달래고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가난해 혼인 못한 두 오누이
어느 따뜻한 봄날에 둘이 장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소나기를 만나 고개 마루 큰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비에 젖은 모습이 부끄러웠던 누이는 앞장 서 걸어갔다.
그뒤를 따라 걷던 오라버니는 생전 처음 느낀 야릇한 느낌.

오리버니는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돌로 짓이겼다.
누이는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자 되돌아 찾아나섰다.
고개마루에 이르자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오라버니.

"못참겠걸랑 달래나 보지..흑흑흑, 달래나 보지."

누이는 오라버니가 죽은 그 자리에서 뒤따라 숨졌는데
오라버니 붉은 피가 흩뿌려진 자리마다 피어난 붉은 꽃.
누이가 되돌아왔던 길따라 해마다 무리 지어 피어나는 꽃

하여, 훗날 그 고개의 이름이 달래고개
해마다 그 무렵 오누이 혼백이 되살아나듯
그 고개마루 가득 붉게 피어나기에 진달래꽃.
............................................. ..........................

성욕을 못 참는 오빠가 여동생을 범했다 해도,
그것을 부모가 알았어도 큰 일은 못 되는 일본.

일본은 불과 50년 전 태평양 전쟁 당시만 해도
죽은 형 대신 형수와 같이 살아주는 것이 도리

우리나라는 동성동본의 결혼마저 금지했던 풍습.
현재, 부계 모계의 8촌 이내 혼인만 가능하지만
신라시대 우리나라에서도 근친혼 풍습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 여동생 문희와 결혼한 김춘추
김춘추와 문희 사이의 딸과 결혼한 김유신.

김유신은 김춘추?? 처남이자.,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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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꽃은 '19 소녀 젖가슴의 상징'.

흰달래는 철모르는 소녀(少女)의 수줍음.
연(분홍)달래꽃은 사춘기 소녀의 부끄러움.
난(蘭)달래꽃은 결혼 적령기 처녀의 무르익음.

'꽃 빛깔에 따라 각각 이름의 다른.. 달래꽃.'

진달래는 철쭉과 더불어 티없이 맑고 깨끗한 처녀의 상징.
철쭉이 24살 처녀의 순결이라면 진달래는 19살 소녀의 순결.
진달래는 '죽도록 잊지못할 첫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꽃이다.

진달래꽃에는 흥미로운 사랑의 주술이 전해 내려온다.
진달래 꽃 핀 가지에 사랑의 염원을 담아 만든 회초리.
그것으로 매맞으면 때린 그 사람을 못잊게 된다는 주술.

'마조히즘과 사디즘 요소가 깃든 독특한 풍습.'

사랑의 굴레에서 죽도록 헤어날 수 없다는 진달래 주술.
평소 흠모하는 님에게 말못할 속마음을 은밀하게 전하기.
님이 떠나는 날에는 이별의 아쉬움 나눌 때도 진달래 주술.

'진달래 꽃 핀 나무가지에 담긴 사랑의 주술.'

그 사람이 오직 나만을 사랑하게 되길 바라는 염원.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애타는 속마음의 표현.
봄이면, 까닭 모르게 처녀 총각 마음을 들뜨게 하는 꽃.

개나리 보따리 싸들고 고향을 떠나던 청춘남녀.
도시로 떠나 성공해 돌아오겠다며 헤어진 연인들.
서로 헤어져 멀리있어도 변치 말자던 사랑의 언약.

숨김 없이 다 보여주고만 싶은 사랑.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이별의 통한을 진달래 주술로서 달랜 사랑.

'진달래 꽃핀 가지에 담았던 이별의 아픔.'

해마다 피맺힌 그리움이 피어나는 듯.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피는 진달래꽃.
그 님이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마음.

죽도록 변치말자던 맹세의 징표로서 주고받았던 아픔.
굳은 언약을 재다짐하며 진달래 주술을 나누던 연인들.
헤어짐의 아쉬움 달래던 연인 간에 나누던 사랑의 의식.

첫번째 매는 일편 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 다짐하는 뜻
두번째 매는 두 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불경 이부(不更二夫)
마치, '춘향가 십장가' 를 떠오르게 하는 연인간 사랑의 유희.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성숙한 만큼 깊어지는 사랑.'

진달래 꽃말은 '변함없는 사랑' 또는 '사랑의 희열'.
거짓말 영화 속 사디즘과 마조히즘 유사한 전희수단.
칸느 영화제에서 먼저 알려진 후 국내에 소개된 영화

"왜설이냐? 예술이냐?"
말도 많았던, 거짓말.
영화 감독, 장건우 작품.

18세 여고생 Y에게  38세 조각가  J는 이상형 남성.

J는 아직은 나이가 어린 그녀의 프로포즈를 거절한다.

그녀는 여고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던 날에 J를 찾아간다.


그녀는  J에게 순결을 받칠 결심을 하고 여관으로 들어간다. 
J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침대 위에 무릎꿇고 엎드린 그녀. 
이미 J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애타게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은 수평저울 추와 비슷한 감정.

강한 쪽이 약한 쪽에게 사족 못쓰게된다.
사랑의 감정이 무거운만큼 기우는 자존심.
못 견딜 굴욕감까지도 감수하게 되는 사랑.

 

사랑을 갈구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J 
그녀를 타이르는듯  엉덩이를 손으로 다독거린다.
그리고, 수치심과 굴욕감을 강요하듯 매질을 한다.

 

j가 매질 할 때마다 물결치는 그녀의 머리카락.

갓 잡아올린 생선처럼 파닥거리는 도발적 자태.

그가 매질을 할 때마다 토해내는 그녀의 신음소리.

 

굴욕적인 수치심에서 비롯된걸까?

아니면, 회초리 매질이 아픈 탓일까?

 

매를 맞으면서도 사랑의 갈구를 멈추지 않는 그녀.

j가 다가오기를 갈망하듯 굴욕적이고 유혹적인 몸짓.

안타깝게도 그녀 엉덩이에는 온통 회초리 매질 자국뿐.

 

'그녀의 갈구는 그렇게 좌절되는걸까?'

 

그무렵,  그 회초리로 자신을 때려달라는 J.
이어, 그녀 앞에 엉덩이를 드러내고 엎드린 j.
J의 요구에 못이겨 머뭇거리며 회초리를 든 그녀.

 

이상형 중년남자의 가부장적인 권위.

그녀로서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요구.

더욱 아프게 매질을 해달라고 간청하는  j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굴욕적이었던 그녀.

어느덧,  그녀가 j 앞에서 군림하듯., 반전.

방금 전까지 매맞은 앙갚음을 하듯, 때린다.

 

그녀가  겪은 수치심과 굴욕감을 돌려주듯. 
그녀가 매질 할 때마다 j의 엉덩이에 핏자국.

그녀 머리 속에서 이미 사라진 이상형의 권위.

 

둘은  차츰 동격인 연인 사이로서 발전한다.

그녀가 스무살이나 연상인 j에게 반말할 만큼.

둘은 주말마다 여관을 전전하며 밀회를 즐긴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매질은 그들에게 전희의 수단. 
둘 사이에서 맞고 때리는 관계는 차츰 바뀌어 간다.

J가 매를 맞고 Y가 일방적으로 매질하는 사이가 된다. 

 

어느덧, 매질은 그들에게 전희의 수단.

둘 사이에 차츰 폭력으로 변해가는 매질.

둘이 서로 맞고 때리면서  빠져드는.,희열.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녀에게 마음 빼앗긴 j.

어느덧, j의 굴욕스러움이 그녀에게 즐거움.
그녀의 냉소까지도 j에게는 감당 못 할 희열.

 

처음 만날 때와 달리 그녀의 노예로 전락한 j


자신을 자학하듯 그녀에게 때려달라고 애원하는 j
굴욕적인 j에게 무자비할 만큼 폭력을 가하는 그녀.
사디즘에 차츰 빠져드는 그녀와  마조히즘에 중독된 j.

일제 치하에서 번뇌하던 인테리 지식층.
꿈과 희망을 꺾고 술과 여인 품속을 방황.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간 인테리들.

'지나치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학한 탓.'

...소설가 나도향(1902~1926년).....
학력 : 경성의학전문학교 중퇴
데뷔작 : 1921년 단편소설 '추억'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환희, 뽕

1924년 가족 생계를 맡았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죽자, 그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빈곤
여관이나 친구들의 하숙방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방랑 생활

1925년말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가 1926년 귀국
그해 8월 26일 급성 폐렴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백조 동인들이 묘비.
........................................................................... 

 김소월은 나도향과 동갑나기 친구.
김소월 역시 32세 한창 나이에 운명.

아편을 복용하고 음독 자살한 김소월.


조국을 위해 쓸모가 없어졌다는 자괴감.
기생이 몸팔듯 주색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자학과 자괴감에 빠져든 대표적인 지성인들.

'기생의 품속에 안겨 한과 울분을 토로.'

팔도강산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
일제에 빼앗긴 산과 들에서도 봄을 알리던 꽃
추운 겨울을 이겨낸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던 꽃.

'진달래꽃은 절제, 청렴, 민족혼의 상징.'

연인 간에 나눠먹으면 바람기가 사라진다는 진달래꽃.
한방 또는 민간요법에서 강장,이뇨,건위 등에 쓰인다.
한반도 민족혼을 뜻하는 김소월 시인의 민족시 진달래꽃.

..................<진달래 꽃> 詩에 얽힌 이야기.......................
수많은 연인들의 심금을 울린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김소월(1902 8.30∼1934)은 32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시인.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한 인테리.

김소월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
그 영향으로 일제 치하에서 맛본 민족적 분노와 비통함
시의 주제는 저항과 좌절, 의지와 허탈, 분노와 패배감

그 뒤엉킨 감정을 극복하기보다 그것에 휩쓸려가는 풍조
감상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이 퇴폐로 빠져 들던 시기.
피지배층 식민지 민족의 한과 슬픔까지 미학으로 추구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이상주의가 불가능해 지식인들은 좌절.
민족적인 전통이 일제 강요에 의해 단절되고 역사가 전도
삶의 목표와 질서가 무너진 그는 설흔 둘 젊은 나이에 운명.

관동대지진 발생 혼란기에 학업 중퇴하고 귀국.
1924년 조부 광산 일을 도왔으나 광산업이 실패,
가세가 크게 기울자 처가가 있던 구성군으로 이사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지국 개설후 경영(1926) 실패,
1930년대 작품활동 등한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
1934년 12월 24일 8시에 고향 곽산에서 아편 음독 자살.

평북 정주 곽산 남산리에서 출생
처절한 애수를 담고 있는 소월의 시.
그 처절한 애수는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김소월은 진달래꽃 주술같은 사랑을 했던듯.'

1920년 '낭인(浪人)의 봄.'으로 문단데뷔 후 1922년 '진달래꽃'
1923년 민족 혼이 담긴 시를 발표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에서 채란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소월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채란과 깊은 관계.'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불멸의 시 작품들.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으로 이사 후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대표작은 <진달래꽃>

'김소월은 채란과 헤어진 후 죽도록 못잊은 듯..'

채란은 진주 권번사에서 손꼽는 미모의 여류시인이자 기생.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란 채란.
13살 때 편모가 개가밑천을 장만하려고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강산,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
연변에서 소월을 만나 사랑을 나눈 것으로 추정.
소월이 주옥 같은 시를 쏟아낼 만큼, 깊은 관계.

채란은 김소월 시인의 '불멸의 시' <진달래꽃>의 여주인공.
한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방황한 채란.
바라만 보아도 곱지만 하도 흔해 손쉽게 꺽을 수 있는 진달래꽃.

온몸으로 님을 반기듯 봄바람 타고 피어나 꺽여버리기도 하는 꽃.
채란은 진달래꽃 같은 신세라 그 꽃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듯.
그녀는 객지를 떠돌듯 남자의 품속을 돌며 주옥같은 시를 토해낸다.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 없는 몸으로 팔려 다닌 신세.
춤과 노래를 익히고, 고향이 그리울 때면 시로 마음을 달랜 듯.

조국을 잃어 버린 소월과 들병이 신세 채란의 만남.
서로 신세를 한탄하며 자학하듯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당시 소월의 시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나타나 있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 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들면 님.'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지금까지 알려졌다.
김소월의 불멸의 작 <진달래꽃>에는 채란의 심경도 잘 담겨있다.


님은 먼곳에..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곳에. ♬

노래 : 김추자. 조관우. 장사익.

채란은 몸 파는 기생이라 김소월을 사랑하면서도 붙잡지 못한 듯.
빼앗긴 조국 팔도강산에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진달래꽃.
<진달래 꽃> 시는 김소월을 민족시인이라 부르게 했던 불멸의 명작.
................................................................................................


詩.

진달래 꽃.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멀리 떠나보내야 할 때, 그 가슴 아픈 마음.
이미 내 곁에서 떠났어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래서, 떠나가는 님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님이 가시는 무릎 걸음마다 진달래꽃을 뿌리며 고이 보내는 마음.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싶기에, 울고 싶어도 죽어도 아니 우는 마음.
김소월 詩人의 가슴 속에서도 님과 피맺힌 이별은 '한'이 되었나 보다.


이곳 유평리 대원사에서부터 노고단 문수골까지
반란의 역사로 숨진 2만 여명의 토벌군과 남부군.
이 詩로 이곳 못 다한 삶의 진혼들을 위로해 본다.

2004. 10.10. 법일스님 100 주년 탄신 추모제에 즈음하여
2004년 4 월 1일 생을 마감한 정순덕 여인 혼도 달래본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메모 :

 

 

내원골



대대로 자연의 섭리만 쫓아 살아오던 지리산 기슭 주민들
지리산의 마지막 비극이길 바랐던 1948년10월 여순 반란사건.
구례 왕시루봉 서쪽 문수리 계곡에서 국군토벌대와 한판 싸움

그러나,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고
6.25 이후 1963년까지 십수년간 이어졌다.

아늑한 어머니의 품속처럼 고요하고 포근했던 내원골
6.25를 전후하여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현장으로 돌변
격변하는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내원골

1945년 8.15 광복이란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데올로기 전쟁을 겪으며 시작된 지리산의 비극
특히, 내원골은 지리산의 비극이 종지부를 찍은 곳.

내원골에서도 가장 깊은 안내원에서 태어난 정순덕
1950년 16세 어린 나이로 시천면 사리로 시집을 간다.
17세 신랑은 6.25이후 마을을 점령한 공산군에게 부역

국군이 다시 덕산 일원을 탈환하자 부역한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신혼 6개월 앳된 신부도 뒤따라간다.
칠흑 같은 겨울밤, 남편 옷을 챙겨 산으로 들어간., 정순덕.

남편과 상봉한지 20여일 만에 남편을 잃은 정순덕.
그로부터 13년 세월을 짐승처럼 살아야만 했던 그녀.
李洪伊와 함께 그녀가 경찰에 붙잡힌 1963년 12월 11일

그날 상오1시 즈음 자신이 태어난 내원골에서 잡힌 그녀.
당시 내원마을에서 보름간 잠복근무를 하던 산청 경찰 2인.
이홍이는 현장에서 사살됐고, 정순덕은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내원골(안내원)에는 그녀가 살던 집과
그녀가 생포됐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태어난 집은 송두리째 흔적이 없고 집터만 남아 있으며
살던 집은 지금 이 마을에 사는 성한술이라는 사람이 관리

그녀가 이홍이와 마지막으로 저항하다 생포된 집은
안내원마을 유일한 가게 집 뒤편에 창고로 쓰여진다.

이 마을에서 살다가 전란 와중에 다른 곳으로 가서 살다
다시 15년 전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다는 김재용씨(75)는
정순덕이 살던 집과 태어난 곳, 생포된 장소를 아직도 기억

당시의 기억이 너무도 끔찍해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말한다.
네 가구가 사는 안내원마을은 관광지로 겨우 각광받고 있다.
내원사에서 바깥 내원마을 지나 배양이, 안내원마을까지 도로

"외탑이" "쌍탑이" "큰 절골" "작은 절골" 등의 지명

국사봉으로 이어진 안내원마을은 고산지대의 이색적 분지
옛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곳이며 근대 빨치산들의 활동무대
지금부터 그곳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씩 들춰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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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 내원궁에서 유래된 지명., 내원골.
부처가 도솔천에 왕생한다는 불교 신앙관.
미륵사상은 2~3세기 경 인도에서부터 유래.

부처가 56억 7천만년 후 도래한다는 도솔천.
도솔천에서의 하루는 인간 세계에서 약 4백년.

'400년 X 365일' = 도솔천에서의 1년.
도솔천에서 4000년을 머물렀다는 부처.
하여, 산출된 56억 7천만년이라는 세월.

사회 혼란기의 빈곤과 학정에 시달린 민중들.
하루가 지옥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던 민중들
도솔천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정착했던 내원골.

1950년 6,25 전후 사상전에 휘말린 내원골.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은 쑥대밭이 되고만다.
아직도 반란의 역사 흔적들이 물씬한 내원골.

피서철에는 물놀이 인파가 붐비는 내원골.

내원골 개울가에서 남해 사천 푸짐한 회 파티.
특히, 전어 축제 무렵에 푸짐한 된장 상추쌈 회.
부산 해운대에서도 피서철에는 이곳을 찾을 정도.

피서철이 지나면 인적이 드문 내원골.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골' 이라 불리우는 내원골.
여우골이란 전국 어디를 가도 인적이 드문 외딴 곳.
정순덕 여인을 포함한 마지막 남부군 3인의 항전처.

하여, 내원골은 '구미호 골'이라 하는 것일까?

구곡산 아홉 능선이 뻗어내려와 멈춘 명당터 내원사
구미호 골은 신출귀몰한 정순덕 일행을 뜻하는 별칭.
마지막 빨치산들로 최후의 순간까지도 처절하게 투쟁.

그 반란의 역사가 아직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내원골.
1950년부터 1963년까지 남부군들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
안내원마을은 아직도 그 비극적인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다.

'정순덕 생가를 비롯한 안내원 마을 유적지.'

'지리산 남부군 완전소탕' 공식선포 시기로는 1955년 5월 23일.
그러나, 정순덕 외 2 명은 1963년 11월 무렵 그곳에서 붙잡혔다.
그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 산속에서 들짐승처럼 방황했었다.

1948년 10월 구례 왕시루봉 서쪽 문수골의 여순반란군.
토벌대와의 전투에서부터 시작돼 1963년까지 십수 년간
마지막 남부군 3인 소탕으로 지리산 반란의 역사는 종말.

'마지막 빨치산' 남장 여공비로 불렸던 정순덕 여인.

빨치산으로 남다른 악명을 떨치다 사살된 이홍이.
1963. 12. 11. 새벽 1시,내원골에 잠복했던 박기덕.
산청경찰서 대공경찰 박기덕씨, 삼장지서장 김영국씨

두 경찰관은 보름간 잠복 끝에 두 빨치산을 향해 총격
이홍이 현장사살, 정순덕 여인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
그 후 정순덕 여인은 진주지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마지막 빨치산으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던 정순덕 여인.
반면, 정순덕을 생포했던 박기덕씨는 오랜 병마에 사경.
각계 성금으로 진주 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한다.

그러나, 정순덕 여인은 단행본까지 낸 각종 여론의 주인공
전직 대공경찰관 친목단체인 한록회 진주지회 회원들은 분노.
각계에 진정서를 내며 반발해 분단된 조국의 비극을 대변했다.

'반란의 역사' 주인공들에 대한 역사의 엇갈린 평가

반란의 역사 평가는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필요할듯.
그러나, 정순덕 여인의 삶의 역경은 너무 기구한 운명
이제 그녀의 생가이자 붙잡혔던 안내원 마을은 관광지.

안내원 마을 도로를 따라 해발 800m 국사봉까지.

내원사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갈 수 있다.
내원골은 고산지대에서 보기 드문 분지가 이색적이며
옛 불교문화의 유적지이자 마지막 남부군들의 활동무대

지리산 내원골은 아직도 을씨년스럽다 못해 황량한 모습이다.
마른 숲이 스산했을 그 당시 비극을 말해 주는 듯한, 진달래 꽃.
그 혼들은 못 다한 삶의 아쉬움을 호소하 듯, 피빛으로 피어난다.

잡목 숲이 무성하게 뒤덮인, 그 옛날 빨치산들의 생가와 살던 집.
그들이 붙잡혔던 장소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내원골.
초라하고 처참한 당시의 흔적들을 내원골은 그대로 부여 안고 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낡은 이데올로기'
지금은 지구촌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겉보기엔 변함이 없는 듯한.. 내원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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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바깥 내원마을을 지나 배양이 마을, 안내원 마을들.
도로 따라 주변에 집을 짓고 단장하는 모습은 개발의 전주곡
2005년 6월 현재 별장 지대로 변모했다는 현지소식이 안타깝다.

'외탑이, 쌍탑이, 큰절골, 작은 절골, 등등의 지명.'
이곳은 통일신라 화랑들의 수련장 임을 대변해준다.
아울러, 미륵신앙에 나오는 도솔천같은 현세의 이상향

내원골은 신라시대 호국불교 화랑들의 심신 수련장

장당골과 갈라지는 내원사 왼쪽 도로를 따라 계속되는 내원골.
지리산 마지막 남부군이 잡힌 곳이며 암자가 10 여개나 있는 곳.
내원골에 있는 마을은 바깥 내원마을과 안내원마을 둘로 나뉜다.

'불교의 미륵사상 도솔천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들.'

동학혁명 당시 농민들이 이상향을 꿈꾸며 화전을 일궜던 마을.
국사봉으로 이어진 해발 8백m 안내원마을까지 승용차로 접근 可.
내원골은 세련된 경치는 없지만 고산에서 보기드문 분지가 이색적.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중봉으로부터 천왕봉에 이르는 한가운데 위치
계곡의 양 축을 이루는 내원골과 장당골 길이 만.., 100 여 리에 가깝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내원사계곡은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 들머리 지점.

오늘날과 같이 중산리나 대원사까지 차가 들어가지 못하던 시절에는
산청군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이 종점이었기에 덕산에서부터 걷기 시작.
대포리에서 본격적인 산행을 해야 했고 당시에는 등산장비도 없던 시절.

지게 짐 무계만 50 kg이 넘었고,
된장독 지고 오르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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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코스 : 대포리 - 내원사 - 내원골
또는 장당골 - 순두류 - 법계사 -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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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그고 땀을 식혀가며
천왕봉을 다녀오는데 예전에는 3~4 일 소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이던 산행 코스.

내원사 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 내원골과 장당골 갈림길.
내원사 규모는 작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람다운 고찰.

내원사를 한 바퀴 돌아 대나무 숲으로 가면, <내원마을 가는 길>.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는 반면 내원골에는 바깥내원과 안내원마을.
<경상대 자연학습장>이 있는 장당골은 예전의 화전민촌 모두 다 철거.

내원마을 특산물은 곶감과 복조리, 워낙 고산지대라 공기도 맑다.
이곳 주민들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곶감깎고 복조리 만드는 것이 일.
'반란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1948년 10월 전라도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 진압군들의 반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기며 시작되었던 빨치산 역사.
지리산에서는 구례 문수골에서 시작, 내원골에서 마감된, 반란의 역사.
1950.6·.25~1955. 5월 빨치산이 섬멸될 때까지 7년간 접근 금지된 마을.

소개령 이후 원주민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그들이 떠난 빈자리엔 객지인들이 찾이하고 있을 뿐.

'반란의 역사' 산증인들은 고령으로 희미한 옛 기억을 상실.
생존에 있는 산증인조차 거의 역사의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
지금은 아쉽게도 반란의 역사 현장들이 전설처럼 잊혀져간다.

 

 

 

 

 

 

정순덕 여인.



조개골 내원골 일대는 빨치산 최후의 항전처.
빨치산 전용 방앗간이 있을 규모의 중요 거점.
법일스님이 50 년간 떠나지 않았던 대원사계곡.

'내원골 초입은 정순덕 여인의 체포 현장.'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유격부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 정예부대.
노고단에서 내원골까지 토벌군을 포함 사망자만 2 만명.

'정순덕 여인 체포로 막을 내린, 반란의 역사.'

제주 4.3 민중항쟁 진압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국군.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항쟁 진압 거부.
반란군이 된 여수 14연대가 지리산 문수골로 쫓기며 남부군.

그 반란을 이용해 지리산을 적화기지로 이용한 공산당.
그들을 진압하려 군경연합으로 지리산에 투입된 토벌군.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주민들은 그 틈새에서 방황.

1955년 5월 23일.
남부군 소탕 완료.

그전까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주민들.
밤낮으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이
생명과 맞바꾸어 지는 일로 직결.
지리산 주변 주민들이 겪었던 고초.

1949년 9월에서 12월 사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 여 주민들이 몰살당한 사건.

좌익 혐의로 덕산 농업 창고에 수용되어
토벌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차례로 총살.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 명
경남 사천군 새동 공동묘지에서 총살.

1951년 '산청 함양 주민 대학살사건'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이다.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랬었는지
자세한 사연조차 알 수 없는 사건들.

중군리 구진벌, 군자리 앞산,
시천면 신천국민학교, 경호강변.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에서
산골주민들이 집단 총살 당한 사건들.

1951. 3. 12.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 골짜기에서 500 여명 주민들.
토벌군에 의해서 총살 당한 산골 주민들

남부군에 의해 숨진 주민들
비슷한 숫자였을듯 추정된다.

어느 편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산으로 들어갔던 주민들.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따라서
가장을 따라 산에 올랐던 남은 가족들.

남북간 사상전에 휘말려 죄없이 죽어갔다.
지리산 속을 방황하며 병들거나 굶어 죽고,
토벌군에게 총맞아 죽고, 얼어 죽기도 했다.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도
그런 산골마을의 평범한 새색씨.
사상과 이념을 떠나 되새겨 본다.

그녀는 어찌하다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었을까?
여자 몸으로 무슨 사연이 있어 남부군이 되었을까?
하여, 그녀의 진술기록을 찾아 그 내용을 소개한다.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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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덕 여인의 진술 내용을 읽다가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길을 걸었을 듯.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도망다녔던 남부군들의 최후.

결국, 공산주의에 이용 당하고, 버림 받고, ?捐꽁求鳴? 죽어갔다.
이제는 그 백골들이 진토가 되어 지리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법일스님은 그 영혼들을 달래려고 대원사를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국사봉 가는길' 내원골은 남부군 정순덕 여인의 관광 코스.
국사봉은 옛날 봉화를 올렸던 산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불렀다.
마을을 재앙에서 지키려고 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것이 국사당.

따라서, 천제단 또는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국사당.
몽골 '오보' 신앙이 한반도에서 산신신앙과 결합한 흔적.
거기에 고대중국 '성황'신앙이 들어와 기능과 명칭이 복합

국사당은 옛부터 속칭 고갯마루 서낭당이라고도 불리워왔다.
국사봉 지명은 원나라에 80년 간 지배받았던 고려 시대 흔적.
국사봉이란 지명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남아있다.

산청군은 몽골의 고원과 같아 고대 북방 유목민 풍습이 많다.
산청군 일대는 한반도 고대국가 간에 전란이 빈번했던 격전지.
하여, 국사봉은 마을 재앙이 유난히 많았던 고갯마루를 뜻한다.

'13년간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이 버틴 <내원골>.'

17 살 신랑은 결혼 직후 6.25가 터지자 공산군 수중에서 부역.
국군이 덕산을 탈환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피했고
신혼 새색씨 그녀는 그해 겨울 밤, 남편 찾아 지리산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16 살 어린 신부에겐 가시밭길 인생 역경이 시작된다.
지리산에서 남편과 함께 지낸지 불과 20 여일 만에 다시 헤어진다.
내원골 안내원 마을엔 그녀가 살았던 집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천왕봉-중봉-써레봉-국사봉-구곡산(961m) = 황금(동남부)능선.
30km 능선의 초원지대가 가을엔 황금빛으로 물들어 붙여진 이름.
덕산 뒷산인 구곡산까지 이어진 써레봉-중봉-천왕봉 구간은 20km.

써레봉은 등산로가 미로와도 같아 길찾기가 어려워 등산객이 드물다.
국사봉은 안내원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 큰 절골, 작은 절골로 나뉜다.
그녀가 태어나 남부군이 되어 붙잡힌 순간까지의 마지막 활동무대이다.

1960년까지 순두류를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
봉화대 역할을 한 남부군 활약무대였고 지휘부대가 있던 곳.
깊은 산중이면서도 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절묘한 은신처.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한, 정순덕 여인.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17세 성석조씨와 16세에 결혼.
1950년 결혼 직후 6. 25 동란에 공산당에게 남편은 6개월간 부역.
1951년 1.4 후퇴 후 국군이 탈환하자 남편 따라 지리산에 들어감.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1952년 남편 전사).
1953년 남부군 노영호 부대에 편입하여 거점을 덕유산으로 옮김.
1963년 산청군 내원골에서 국사봉 거점으로 남부군 활동 중 체포.
1963년 11월 체포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고 한쪽 다리를 절단.

1985년 8월 15일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후 가석방.
1988년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다가.. 자립하기 위해서 나옴.
1995년까지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1995년 비전향 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 만남의 집 ’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 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을 촉구했지만 무산되었다.
2004년 4월 1일 운명후 통일로 길목인 파주 보광사에서 영결식.

정순덕 여인의 비화는 생전처럼 사후에도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듯..
16세 새색시, 18세 대성골 불바다 속 5일 사투 끝 기적 생존, 72세 타계.


초혼. - 김소월 作.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속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선녀굴.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뒷산에 위치한 선녀굴
정순덕 여인이 20대 청춘을 숨어살며 보낸 곳.
당시 수색작전에 참여한 분들과 목격자들 증언.

마천, 추성, 송대, 남호, 동강, 문정 주민들 구전.

지리산은 남부지방에서 가장 일찍 첫눈이 내린다.
단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왕봉 주위에는 하얀 눈
겨울이 일찌기 찾아오고 봄은 제일 늦게 찾아오는 곳.

'1962년 2월 겨울이 한창이었던 마천 추성골.'

칠선계곡 쪽에서는 천왕봉 아래 희끗희끗 쌓인 눈.
추성리에서 바라보면 겨울이 지나가기엔 아직도 요원
사찰(유격대) 경찰들은 칼빈 소총의 잠금 장치를 한 채
흙으로 채운 마대로 쌓은 토치카 안에서 지루한 하루 하루.

19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된 빨치산들은 다시 지리산으로 집결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경찰의 소탕작전은 1955년 후반부터 1956년까지 실시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빨치산 부대들이 소멸.

이현상이가 빗점골에서 사살되고 그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거의 사라졌다
당국이 공식선포한 시기는 1955년 5월 23일.

그러나, 1956년 말까지,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
1953년 7월 휴전 후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활동
당국에서는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사찰 경찰을 임명
향토 방위 또는 빨치산 소탕 작전 때엔 도우미 역할

문영만과 지동식은 이런 사찰 경찰로서
추성리 빨치산 신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마천 지서의 지시에 따라 무한정 경계 근무

가끔은 칼빈 소총으로 몰래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벌목꾼이나 숯꾼들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고 부수입.
향토 방위대 소집권한도 부여받아 제법 괜찮은 위치.

고사리나 산채를 채취하러 가는 주민들을
빨치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감시
관솔(소나무 기름이 엉긴 나무) 채취 허가권.

몇년 동안 이렇다 할 전투하나 치루지 못하고
기약 없는 방위 임무만 부여받은 채 하루 하루
어느날 추성골에서 곰을 보았다는 나무꾼의 제보

몇 달 동안 뜸했던 곰 사냥 생각이 간절했다.
꼭 곰이 아니라도 송아지 만한 노루사냥 계획
추성골 석이버섯 전문 채취꾼 허정갑을 안내자

18세의 기골 장대한 허정갑에게는 대나무 죽창
세 사람은 벽송사 뒤쪽 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빨치산이 숨을 곳을 없애려 불을 질러 온통 민둥산

약초꾼들이나 나무꾼들이 오르내리던 길목이지만
빨치산들의 출몰 위험 때문에 다져 있지 않은 산길.
정순덕 일행이 언제 집중사격할지 모른다는 강박의식

그들은 선녀굴을 거쳐 독바위 넘어 쑥밭재로 갈 계획.
마천 지서에는 빨치산 수색작전이라고 변명을 할 요량
북서쪽 능선에는 쌓인 눈위에 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

아직도 지리산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는 정순덕

눈위의 발자국으로 추적하기에 아주 용이하다는 계산
신출귀몰한 정순덕 여인을 잡거나 사살하면 큰 보상금
평생 행복을 보장받을 만큼 거액이 눈앞에서 오락 가락.

산 능선을 두어 시간을 올랐을 때
개가 발버둥을 치며 낑낑대기 시작.
문영만은 사냥개 목줄을 풀어 주었다.

무엇인가 냄새맡은듯 선녀굴로 달려가는 사냥개
두 사람은 선녀굴을 향해 카빈 총구를 겨냥했다.
6.25 무렵에는 약 2만 빨치산들과 군경찰 토벌대

지리산에서 활개치며 양민들을 참 많이도 괴롭혔다.
젊은이들에게 보급투쟁 명목으로 약탈한 생필품 운반.
공산당 세뇌 교육을 시켜 빨치산 부대로 편입하곤 했다.

빨치산이 가장 많이 출몰하였던 마천 지역

경찰의 힘으론 그네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어서
마을 청년들로 향토 방위대를 조직해 빨치산과 대적
향토 방위대와 빨치산의 첫전투는 독바위 아래 노장대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향토 방위대
빨치산들은 여러번 마천 지서 습격사건,
면소재지 당벌마을을 습격한 빨치산 공세

함양 빨치산 주요거점은 노장대 신밭골 쑥밭재
산청 빨치산 부대와 정보교환을 할 때는 사립재
주요 지시사항이나 공격목표, 부대사항등 정보교환

특히, 독바위 인근 '천연의 요새' 선녀굴을 위시해서,
노장대 마을 위쪽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 등 은신처.
눈비 또는 한겨울 칼바람을 피하기엔 아주 적당한 장소

많은 빨치산들이 살다시피 했던 곳이 선녀굴 근처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이어 고막을 찢어낼 듯한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
총소리와 함께 개짖는 소리도 동시에 뚝 끊어졌다.

세 사람의 이마에서 땀이 송송 맺혀지기 시작했다.
그 칼빈 총소리는 분명 공비의 소행이라 확신한 탓.
잠시후 선녀굴 가파른 바위위에 물체가 어른거렸다.

문영만과 지동식의 카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바위 위 검은 물체가 아?≤各막? 굴러 떨어졌다.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린 물체는 분명 사람 같았다.

선녀굴 바위에 총알이 튀며 불꽃이 팽팽 돌았다.
안내자인 허정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 사람의 등에서는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올랐다.

엎드려 쏴 자세로 약 30분이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인가 총맞고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선녀굴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겁이 났다.

짙은 산그림자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주변에서는 억새와 싸릿대를 스치는 바람소리.
공비들이 자리를 옮겨 공격할 것만 같은 불안감

세 사람은 선녀굴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듯 도망쳤다.
산죽 비트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몇년 간 조용했던 선녀굴의 인근에서 요란한 총소리
우남마을, 세동마을, 송대마을 추성마을, 광아리 마을
등지에서는 주민들이 불안감에 몸들 바를 모르고 있었다.

선녀굴로부터 약 2km 아래에 위치한 송대 마을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알수 없는 불안감
그날 문영만과 지동식은 공비사살 사실을 신고.

이미 날은 저물었기에 다음날 새벽에 비상 총출동
선녀굴 주변지역 수색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 김희준, 이은조, 이홍희, 지동선,
이용순, 이재봉,정순덕이 뭉쳐 다니다가
김희준, 지동선은 1954년 10월쯤 사살되고,
정순덕 이은조, 이홍희가 지리산을 헤멘다더라. "

" 전쟁이 끝난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빨갱이 놈들이 지리산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

" 정순덕 이은조 이홍이 이 세 놈 뿐입니더.
셋만 잡으면 더 이상 빨 갱이가 없는기라예 "

만약 정순덕을 사살했다면
보상금이 다른 빨치산 보다
훨씬 더 비싸다고 알고있었다.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성석조씨와 열 여섯에 결혼
남편은 마을에 진주했던 인민군에게 포섭 당해 빨치산

그해 9월 그녀는 남편을 찾아 지리산 도장골로 입산.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
1952년 대성골 전투에서 남편의 전사를 확인하게 되고,

1953년 노영호 부대에 편입되어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금원산, 황석산, 괘관산을 거쳐 다시 지리산으로 활동무대

'정순덕 여인의 본명은 호적 상으로는 정순점.'

1950년대 삼장면 내원골은 지리산 오지 중 오지.
당시 17살이면 요즘 여고 1학년 수준의 정신 연령.
당시 지리산 주민들은 공산군이 들어오면 그들을 환영

국군이 들어오면 반기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빨치산에 포섭 될 수 밖에 없었고
경찰들은 그 가족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했으리라.

남편이 그리워 정순덕은 결국 산으로 들어갔고
그녀도 진양군 유격대 일원 빨치산이 되고 만다.

나중에 남편이 대성골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빨갱이보다 더 열렬한 빨갱이가 되어 버렸던 그녀.
6.25 전란 중에는 좌익과 우익 둘 중 하나를 선택

그녀의 남편 성석조는 우익을 선택할 권한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좌익의 편에 선택되어졌던 남편의 운명
정순덕의 운명도 함께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비극

" 햐! 그놈들! 지독한 놈들이제.
쏙밭재나 신밭골 근처 목기 나무꾼들 움막집
선녀굴, 독 바위 밑의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

겨울엔 납작한 돌에다가 불을 지펴 달군 후에
모포로 감싸 깔고자면서 겨울를 견뎌 낸다더군.
정순덕이가 선녀굴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카던데. "

선녀굴 입구는 작은데 그 안은 살림해도 될 공간.
" 그런데 12년 동안 산속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 "

" 가을에 벼이삭을 훑어 큰 소주병에 저장했다가
긴 꼬챙이로 한나절 내내 비벼 대면 한 주 먹의 쌀
소금 간을 해서 죽도 해먹고, 밤 버섯을 볶아도 먹고,

보리에 쌀을 섞은 주먹밥을 소금에 찍어 먹기도 하구,
송이버섯, 두릅, 더덕, 때로는 곰이나 산돼지를 사냥
6.25가 끝날 무렵 동네에서 식량을 많이도 빼앗아 갔지.

그 놈들은 쌀이나 고기를 절대 지고가지 않고
동네 젊은이들에게 강제로 짐꾼 노릇을 시켰지."

수색대는 칼빈 총을 든 사찰 경찰과 경찰들은 앞장
나머지 대원은 멀찌감치 뒤따르며 선녀굴 근처를 수색
마침내 총에 맞아 숨진 사냥개 한마리의 시체를 찾았다.

순간 대원들은 개가 있는 주변으로 우르르 모였다.
선녀굴 입구에는 바위 틈새에서 나오는 샘물이 있다.
6.25 전후에는 선녀굴이 빨치산 소굴이나 다름 없었다.

산불에 타다 남은 나무 뿌리와 삭정이가 있고
그 아래 시커멓게 그을린 개가 쳐박혀 있었다.
선녀굴에서 능선 하나 사이에 가깝게 '독바위'

그 바위 위에 올라서면 엄천강은 물론 함양읍과
멀리 왕산과 산청 주변까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수색대는 독바위를 뒤로하고 배바위 주변을 수색
더 아래로 내려와 망바위 위에 서서 주변을 탐색
노장대 근처의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까지 수색.

지리산에서 찾아보기가 힘든 박쥐 떼를
노장대 근처 박쥐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빨치산들이 몇년간 기거하면서 불을 피워
박쥐가 사라졌다가 박쥐굴에는 다시 박쥐떼
동굴 천장에 더덕 더덕 붙어 오수를 즐기는듯.

6.25 이전에는 숯 꾼들의 움막터나 목기 생산지.
6. 25 이전엔 27가구까지 살았다는 노장대 마을
빨치산 때문에 소개령에 의해 주변 마을로 분산

'우남, 세동, 송대, 동강, 운서, 모전 마을'

지친 수색대들은 선녀굴 동굴 입구의 샘물을 들이켰다.
보상금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문영만 지동식 허정갑
마을까지 내려올 동안에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앞서 내려가던 마을 향토 방위대 대원들의 불평 불만.
뒷쪽 3 사람에게 연거푸 들려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962년 2월까지 선녀굴 일원에서 숨어살던 정순덕 여인.

1963년 11월에 산청군 내원골에서 이홍이가 사살되고
대퇴부에 총맞고 생포된 정순덕이 증언한 내용을 보면
당시 선녀굴에서 사살된 빨치산은 '이은조'로 밝혀졌다.

그녀가 당시 이은조 시신을 땅속에 매장.
산청 등지의 산골을 전전하며 숨어산 것.

빨치산 소탕 작전이 수없이 전개될 때마다
산청, 남원, 함양 쪽 지리산을 오고 가면서
1962년 2월까지 들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그녀.

1963년 11월에 산청의 내원골에서 생포되고,
비전향 장기수로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된다.

2004년 4월 1일 파란만장하던 일생을 마감한 그녀.
20대 꽃다운 나이를 거의 선녀굴에서 보낸 정순덕.
휴천면 송전리 송대 마을 뒷산 선녀굴에 얽힌 비화 


 

임천강변  도로따라 견불사 방향

초입지 가는 중 지리산 와불 모습.

 

 

 

견불산 입구 임천강에 용담정

 

 

 

용담정 안 거북이

 

 

 

견불사을 지나 송대 마을 입구 이정표

 

 

 

송대 마을 입구

 

 

 

 

안내소 안에 전시 되어 있는 기록물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선녀굴 샘.

 

 

 송대 마을에서 벽송사로 가는 이정표

 

 

 

송대마을 초입에 날씨가 추워 얼음이 쌓여 있다..

 

빨치산 산죽 비트.

 

 

산죽 비트 지나면., 바위 비트.

 

 

밤에는 빨치산, 낮에는 국군이 장악했던.,독거촌 마을.

 

 

 

독거촌 마을 비트모습

 

 

 

 

선녀굴 비트장

 

 

 

 샘이 있어 빨치산이 활동할 수 있었던.,선녀굴.

 

 

 

선녀굴 안내판...

 

 

선녀굴에서 우측으로 가면 벽송사

왼쪽으로 가면 솔봉능선으로 가는데

솔봉능선으로 가면 노장대 전망바위 쪽.

 

 

 

노장대 표시기

 

 

노장대에서 와불상의 지리산 모습 전망,

 

 

노장대에서 욍산 방향의 조망

 

 

 

노장대 안내판.. 여기서 위로 올라 가면 하동 독바위.

 

 

 

노장대에서 바라본., 하동 독바위.

 

 


 

 

독바위에서 안락문 방향

 

 

 

 


송대마을. 



지금은, 함양에서 빨치산 관광코스로 개발.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선녀굴 코스
4㎞ 거리에 해발 900m라 3시간 이내 도보거리,

임천강변 5가구가 사는 송대마을이 들머리.

마을 위쪽에 12평 규모의 '지리산 빨치산 루트 안내소'
선녀굴 루트, 함양 5개 빨치산 루트와 빨치산의 활동상
자세히 설명해 주는 스크린 및 안내판, 산악 루트 모형도.

선비골로 10분 오르면,
빨치산 매복 산죽 비트

산죽 밭엔 빨치산 마네킹 2개이 따발총과 카빈소총을 겨눈 자세.
팔다리에 붉은 칠을 한 붕대를 감고 있는 초췌한 모습의 마네킹.
1949년부터 5년 동안 1만 717회에 걸친 교전에서 사망자 2 만명.

'산행깃점 송대마을에서 1시간 거리의 선녀굴.'

웅장한 기암 밑 샘에서 선녀가 목욕했다는 전설의 동굴.
1963년 2월 남로당 하동군 인민위원장 이은조 사살된 곳.
20 명이 앉을만한 화강암 동굴 입구에 여성 빨치산 마네킹.

굴 주변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총탄 흔적들.
마지막 남부군 3총사 '정순덕 外 2人'의 은닉처., 선녀굴.
여기서 1㎞ 오른쪽으로 떨어진 정상부의 독바위(노장대).

유두류록 첫날 밤 야영지 고열암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벽송사,마천면 추성마을로 이어지는 벽송사 루트가 나온다.
송대마을에서 출발하면 왕복 총 9㎞로 6시간 가량 소요된다.

속리산 문장대와 비슷하게 생긴 당당한 위풍의 독바위
지리산 동북부의 망루라 부를 만큼 주변 경관이 보인다.
천왕봉, 임천강, 경호강, 멀리 거창, 합천까지도 보인다.

동강마을, 운서, 운암마을, 망바위, 배바위, 독바위
일명, 노장대 루트는 5~ 6㎞로 5시간~ 7시간 소요.
<지름길은 5.35 km이고, 능선 길은 약 5.95 km 거리>

마천면 강청리, 인민군 총사령부 막사터, 두지터, 추성마을
5㎞ 구간은 백무동 루트로 3시간 소요되며 빨치산 루트이다.

하정마을, 영원사, 문수암, 군자마을 11㎞ 6시간 영원사 코스.
하정마을은 빨치산의 인민재판과 즉결 처형이 이뤄진 곳이다.
군자마을은 낮에 토벌대, 밤엔 빨치산에게 학살된 비극의 현장.

시천면 중산 관광단지 내 2층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빨치산, 토벌군의 유품 전시장, 내원사 계곡은 4개 빨치산 루트
이 일대가 치열했던 토벌군과 빨치산 간 격전장이었음을 말해준다.

 

 

 

진달래 꽃.


 


봄이면 우리나라 어느 산야를 가도 진달래꽃이 만발한다.
지리산에 연분홍 진달래꽃을 보면 정순덕 여인이 생각난다.
특히, 꽃샘추위 눈 내릴 때 진달래 꽃에 피어난, 눈꽃 고드름.

하얀 설원에 선혈의 흔적인듯 붉은 진달래 꽃
진달래 꽃몽우리 위에 피어난 백색의 눈꽃나라.
마치, 첫날밤 새색시 혈흔의 흔적 같은 아름다움.

'대원사에서 노고단까지 봄을 알리는 진달래꽃.'

빨치산 죄목으로 불타 죽은 혼들이 꽃으로 환생한 듯.
남북이 하나 되라는듯 핑크 빛으로 백두대간을 덮는다.
<한국 중국 둥베이 일본 몽골 우수리>는 진달래 자생지.

진달래 꽃은 4월의 봄 팔도강산을 붉게 불들이는 꽃.
일명 두견화라 하는 진달래꽃은 화전이나 두견주 재료.
화전은 애욕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씻어준다는 사찰 음식.

.........'애욕아,내 이제 너의 근본을 알았노라.'........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제자 아난다와 왕기사가 함께 걸식을 마치고 되돌아가는데
아름다운 여자가 왕기사를 보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웃었다.

왕기사가 부정관(不淨觀)으로 그 여자를 살피니
애욕이 자기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 왕기사가 깨달음을 얻어 게송으로 말했다.

"애욕아, 내 이제 너의 근본을 알았노라.
너는 다만 생각으로 생긴 것이거니
만약,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너는 나에게 없는 것이니라."

부처님께 돌아온 아난다와 왕기사는
그간 일을 게송으로 부처님께 말했다.

"육신(色)은 물방울과 같고
느낌(受 )은 물거품과 같으며
기억(想)은 아지랑이와 같고
의지(行)는 파초와도 같으며
의식(識)은 환상과 같나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텅 비고 고요해
진실로 참된 것이 없거늘
이 몸으로 인연하여 매달렸나이다.

이 몸이란 환상과 같은지라
내가 매달려야 할 실체가 없나니
이제 오온이란 것은 모두 덧없는 것임을 알아
애욕을 떨치고 다시 법안으로 돌아왔나이다."

부처는 왕기사의 게송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착하고 장하다. 왕기사여,
내가 보리수 아래에서 오온을 살펴보고 깨달았을 때
그대가 오늘 이해한 것과 같았었느니라." - <증일아함경>
...............................................................

'옛부터 불교와 관련깊은 듯한., 진달래꽃.'

'진달래꽃술은 100일 지나야 제 맛이 난다.'하여 백일주
한꺼번에 많이 마시기보다는 조금씩 마셔야 몸에 좋단다.
진달래꽃은 두견새가 토한 피에 물든 꽃이라 하여..'두견화'.

두견새 = 귀촉도, 망제혼, 소쩍새, 불여귀, 자규.

촉나라 임금 '두우'의 원통한 혼이 다시 환생한 새.
어느날 물에 빠져 떠내려 온 별령(鱉靈)을 구해준 왕.
하늘이 내린 인재라 여기고 정승을 삼아 국사를 맡겼다.

별령은 촉나라 대신을 모두 매수하여 심복으로 만들고
정권을 장악한 후 두우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하루 아침에 나라를 빼았긴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두우.

두견새로 환생하여 목에서 피가 나도록 밤새 울던 두우.
훗날 사람들은 그를 원조 또는 두우(杜宇)라고도 하며,
귀촉도 (歸蜀途) 혹은 망제혼(望帝魂)이라고도 부른다.

진달래꽃은 보릿고개 굶주림을 달래주었던 간식.
보릿고개란 묵은 해 곡식이 떨어지는 음력 4~5월
보리가 여물기 전 농가에서 가장 식량이 귀한 시기.

춘궁기(春窮期) = 맥령기(麥嶺期) = 보릿고개.

농민들은 추수 때 소작료 빚 이자 세금을 갚고.
남은 식량으로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견뎌야 했다.
이때 농민 대부분 풀뿌리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웠다.

걸식과 빚으로 연명하거나 유랑민 떠돌이가 된 농민들.
일제 치하, 8.15 해방 뒤 1950년대까지 겪은 보릿 고개.
꽃으로라도 허기를 달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하여 일명 참꽃.
진달래와 유사하지만 먹을 수 없는 꽃들은 개꽃.
진달래는 참 '진(眞)’자와 ‘달래’를 합친 합성어이다.

'나무꾼과 선녀' 전설에서 유래된 진달래꽃 이름.

..................진달래꽃 전설..............
하늘나라 옥황상제 꽃밭을 가꾸며 살던 선녀.
어느 봄날 지상에서 피어난 붉은 꽃을 발견한다.
선녀는 그 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넋을 잃고 만다.

"처음 보는 꽃인데 하늘나라에 심어야지."

선녀는 그 꽃을 뽑으려다가 땅으로 떨어져 다쳤다.
마침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나무꾼이 선녀를 발견.
다친 선녀를 집에 데려다가 정성껏 보살펴주어 회복.

'선녀와 나무꾼 사이에서 태어난 딸 달래.'

하늘나라 꽃밭 가꾸던 시절이 늘 그리웠던 선녀.
진달래 한뿌리를 캐어들고 하늘나라로 올라간다.
그러나, 선녀를 사랑했던 나무꾼은 원망도 못한다.

선녀가 하늘로 올라간 뒤 남겨진 달래와 아버지.
달래는 나무꾼 아버지와 단둘이 산속에서 살았다.
달래를 키우며 부인을 향한 그리움을 잊은 나무꾼.

'선녀처럼 아름답기로 소문난 달래.'

원님이 정절을 탐하자 목숨을 끊은 달래.
딸마저 잃게되자 스스로 목숨 끊은 나무꾼.
그 이듬해 나무꾼 진씨 무덤에 핀.. 전설의 꽃.

댈래 혼백이 아버지를 위로하려 꽃으로 환생.
하여, 나무꾼 진씨 + 그 딸 이름 달래 = 진달래.

그후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라 참꽃.
참꽃은 나무꾼 진씨의 성에서 유래된 이름.
원래 진(陳)씨가 참 진(眞)으로 바뀌어 참꽃
.............................................................

참꽃은 먹을 수 있는 꽃이란 뜻의 이름.
향긋하고 새큼 달콤한 진달래꽃의 참 맛.
먹을 수 없는 개진달래는 개꽃이라고 한다.

'먹을 수 있는 꽃 중의 꽃' 진달래꽃.
첫사랑 그녀의 체취와 같은 진달래꽃.
입안에 그윽히 감도는 진달래꽃 뒷 맛.

진달래꽃을 한웅큼 흩뿌려 띄워놓은 막걸리.
그냥 바라만 봐도 입맛이 당길만큼 참 좋다.
특히, 산나물을 따서 넣고 비빈 진달래 꽃밥.

진달래가 질 무렵 피는 개진달래는 개꽃.
일명 물철쭉(개진달래), 철쭉은 모두 개꽃.
철쭉은 순결한 처녀의 혈흔 또는 순결의 상징.

진달래꽃은 진나라에서 들어온 유민들의 꽃.
이국만리 고향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꽃인듯.
진나라 유민들에게 향수병을 달래주던 진달래꽃.

진시황이 창건한 진나라는 티벳족이었고
초나라, 위나라, 정나라는 남방 묘족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에게 억압받던 민족들.

남방 묘족은 언덕에 올라 연인끼리 사랑.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
연인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 위한 행위.

'그 남방 묘족들에게 사랑받던 진달래꽃.'

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진시황
봉건제 폐지, 군현제 실시로 중앙집권체제 확립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제도 개혁

..............주.................
중국과 한반도 한자가 달라진 시기.
진나라의 문자 통일 이후로 보인다.

제 4빙하기후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
중국과 한반도 일본은 차츰 대륙에서 분리.
문자, 문화, 관습 등이 차츰 더 달라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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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아방궁 건설 등에 3백만명의 노동 동원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 대공사를 감독케 한다.
그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다.

'과중한 조세 부담, 가혹한 형벌제도.'

진시황 폭정에 못이겨 자유를 찾아 탈출.
기원전 고향을 버리고 한반도로 이주한듯.
한반도에는 진달래꽃에 얽힌 전설이 참 많다.

................진달래꽃과 달래고개 전설................
충청도 금산 적벽 강가 인삼마을 인근의 달래고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가난해 혼인 못한 두 오누이
어느 따뜻한 봄날에 둘이 장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소나기를 만나 고개 마루 큰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비에 젖은 모습이 부끄러웠던 누이는 앞장 서 걸어갔다.
그뒤를 따라 걷던 오라버니는 생전 처음 느낀 야릇한 느낌.

오리버니는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돌로 짓이겼다.
누이는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자 되돌아 찾아나섰다.
고개마루에 이르자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오라버니.

"못참겠걸랑 달래나 보지..흑흑흑, 달래나 보지."

누이는 오라버니가 죽은 그 자리에서 뒤따라 숨졌는데
오라버니 붉은 피가 흩뿌려진 자리마다 피어난 붉은 꽃.
누이가 되돌아왔던 길따라 해마다 무리 지어 피어나는 꽃

하여, 훗날 그 고개의 이름이 달래고개
해마다 그 무렵 오누이 혼백이 되살아나듯
그 고개마루 가득 붉게 피어나기에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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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을 못 참는 오빠가 여동생을 범했다 해도,
그것을 부모가 알았어도 큰 일은 못 되는 일본.

일본은 불과 50년 전 태평양 전쟁 당시만 해도
죽은 형 대신 형수와 같이 살아주는 것이 도리

우리나라는 동성동본의 결혼마저 금지했던 풍습.
현재, 부계 모계의 8촌 이내 혼인만 가능하지만
신라시대 우리나라에서도 근친혼 풍습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 여동생 문희와 결혼한 김춘추
김춘추와 문희 사이의 딸과 결혼한 김유신.

김유신은 김춘추?? 처남이자.,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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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은 '19 소녀 젖가슴의 상징'.

흰달래는 철모르는 소녀(少女)의 수줍음.
연(분홍)달래꽃은 사춘기 소녀의 부끄러움.
난(蘭)달래꽃은 결혼 적령기 처녀의 무르익음.

'꽃 빛깔에 따라 각각 이름의 다른.. 달래꽃.'

진달래는 철쭉과 더불어 티없이 맑고 깨끗한 처녀의 상징.
철쭉이 24살 처녀의 순결이라면 진달래는 19살 소녀의 순결.
진달래는 '죽도록 잊지못할 첫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꽃이다.

진달래꽃에는 흥미로운 사랑의 주술이 전해 내려온다.
진달래 꽃 핀 가지에 사랑의 염원을 담아 만든 회초리.
그것으로 매맞으면 때린 그 사람을 못잊게 된다는 주술.

'마조히즘과 사디즘 요소가 깃든 독특한 풍습.'

사랑의 굴레에서 죽도록 헤어날 수 없다는 진달래 주술.
평소 흠모하는 님에게 말못할 속마음을 은밀하게 전하기.
님이 떠나는 날에는 이별의 아쉬움 나눌 때도 진달래 주술.

'진달래 꽃 핀 나무가지에 담긴 사랑의 주술.'

그 사람이 오직 나만을 사랑하게 되길 바라는 염원.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애타는 속마음의 표현.
봄이면, 까닭 모르게 처녀 총각 마음을 들뜨게 하는 꽃.

개나리 보따리 싸들고 고향을 떠나던 청춘남녀.
도시로 떠나 성공해 돌아오겠다며 헤어진 연인들.
서로 헤어져 멀리있어도 변치 말자던 사랑의 언약.

숨김 없이 다 보여주고만 싶은 사랑.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이별의 통한을 진달래 주술로서 달랜 사랑.

'진달래 꽃핀 가지에 담았던 이별의 아픔.'

해마다 피맺힌 그리움이 피어나는 듯.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피는 진달래꽃.
그 님이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마음.

죽도록 변치말자던 맹세의 징표로서 주고받았던 아픔.
굳은 언약을 재다짐하며 진달래 주술을 나누던 연인들.
헤어짐의 아쉬움 달래던 연인 간에 나누던 사랑의 의식.

첫번째 매는 일편 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 다짐하는 뜻
두번째 매는 두 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불경 이부(不更二夫)
마치, '춘향가 십장가' 를 떠오르게 하는 연인간 사랑의 유희.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성숙한 만큼 깊어지는 사랑.'

진달래 꽃말은 '변함없는 사랑' 또는 '사랑의 희열'.
거짓말 영화 속 사디즘과 마조히즘 유사한 전희수단.
칸느 영화제에서 먼저 알려진 후 국내에 소개된 영화

"왜설이냐? 예술이냐?"
말도 많았던, 거짓말.
영화 감독, 장건우 작품.

18세 여고생 Y에게  38세 조각가  J는 이상형 남성.

J는 아직은 나이가 어린 그녀의 프로포즈를 거절한다.

그녀는 여고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던 날에 J를 찾아간다.


그녀는  J에게 순결을 받칠 결심을 하고 여관으로 들어간다. 
J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침대 위에 무릎꿇고 엎드린 그녀. 
이미 J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애타게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은 수평저울 추와 비슷한 감정.

강한 쪽이 약한 쪽에게 사족 못쓰게된다.
사랑의 감정이 무거운만큼 기우는 자존심.
못 견딜 굴욕감까지도 감수하게 되는 사랑.

 

사랑을 갈구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J 
그녀를 타이르는듯  엉덩이를 손으로 다독거린다.
그리고, 수치심과 굴욕감을 강요하듯 매질을 한다.

 

j가 매질 할 때마다 물결치는 그녀의 머리카락.

갓 잡아올린 생선처럼 파닥거리는 도발적 자태.

그가 매질을 할 때마다 토해내는 그녀의 신음소리.

 

굴욕적인 수치심에서 비롯된걸까?

아니면, 회초리 매질이 아픈 탓일까?

 

매를 맞으면서도 사랑의 갈구를 멈추지 않는 그녀.

j가 다가오기를 갈망하듯 굴욕적이고 유혹적인 몸짓.

안타깝게도 그녀 엉덩이에는 온통 회초리 매질 자국뿐.

 

'그녀의 갈구는 그렇게 좌절되는걸까?'

 

그무렵,  그 회초리로 자신을 때려달라는 J.
이어, 그녀 앞에 엉덩이를 드러내고 엎드린 j.
J의 요구에 못이겨 머뭇거리며 회초리를 든 그녀.

 

이상형 중년남자의 가부장적인 권위.

그녀로서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요구.

더욱 아프게 매질을 해달라고 간청하는  j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굴욕적이었던 그녀.

어느덧,  그녀가 j 앞에서 군림하듯., 반전.

방금 전까지 매맞은 앙갚음을 하듯, 때린다.

 

그녀가  겪은 수치심과 굴욕감을 돌려주듯. 
그녀가 매질 할 때마다 j의 엉덩이에 핏자국.

그녀 머리 속에서 이미 사라진 이상형의 권위.

 

둘은  차츰 동격인 연인 사이로서 발전한다.

그녀가 스무살이나 연상인 j에게 반말할 만큼.

둘은 주말마다 여관을 전전하며 밀회를 즐긴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매질은 그들에게 전희의 수단. 
둘 사이에서 맞고 때리는 관계는 차츰 바뀌어 간다.

J가 매를 맞고 Y가 일방적으로 매질하는 사이가 된다. 

 

어느덧, 매질은 그들에게 전희의 수단.

둘 사이에 차츰 폭력으로 변해가는 매질.

둘이 서로 맞고 때리면서  빠져드는.,희열.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녀에게 마음 빼앗긴 j.

어느덧, j의 굴욕스러움이 그녀에게 즐거움.
그녀의 냉소까지도 j에게는 감당 못 할 희열.

 

처음 만날 때와 달리 그녀의 노예로 전락한 j


자신을 자학하듯 그녀에게 때려달라고 애원하는 j
굴욕적인 j에게 무자비할 만큼 폭력을 가하는 그녀.
사디즘에 차츰 빠져드는 그녀와  마조히즘에 중독된 j.

일제 치하에서 번뇌하던 인테리 지식층.
꿈과 희망을 꺾고 술과 여인 품속을 방황.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간 인테리들.

'지나치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학한 탓.'

...소설가 나도향(1902~1926년).....
학력 : 경성의학전문학교 중퇴
데뷔작 : 1921년 단편소설 '추억'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환희, 뽕

1924년 가족 생계를 맡았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죽자, 그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빈곤
여관이나 친구들의 하숙방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방랑 생활

1925년말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가 1926년 귀국
그해 8월 26일 급성 폐렴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백조 동인들이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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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은 나도향과 동갑나기 친구.
김소월 역시 32세 한창 나이에 운명.

아편을 복용하고 음독 자살한 김소월.


조국을 위해 쓸모가 없어졌다는 자괴감.
기생이 몸팔듯 주색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자학과 자괴감에 빠져든 대표적인 지성인들.

'기생의 품속에 안겨 한과 울분을 토로.'

팔도강산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
일제에 빼앗긴 산과 들에서도 봄을 알리던 꽃
추운 겨울을 이겨낸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던 꽃.

'진달래꽃은 절제, 청렴, 민족혼의 상징.'

연인 간에 나눠먹으면 바람기가 사라진다는 진달래꽃.
한방 또는 민간요법에서 강장,이뇨,건위 등에 쓰인다.
한반도 민족혼을 뜻하는 김소월 시인의 민족시 진달래꽃.

..................<진달래 꽃> 詩에 얽힌 이야기.......................
수많은 연인들의 심금을 울린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김소월(1902 8.30∼1934)은 32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시인.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한 인테리.

김소월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
그 영향으로 일제 치하에서 맛본 민족적 분노와 비통함
시의 주제는 저항과 좌절, 의지와 허탈, 분노와 패배감

그 뒤엉킨 감정을 극복하기보다 그것에 휩쓸려가는 풍조
감상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이 퇴폐로 빠져 들던 시기.
피지배층 식민지 민족의 한과 슬픔까지 미학으로 추구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이상주의가 불가능해 지식인들은 좌절.
민족적인 전통이 일제 강요에 의해 단절되고 역사가 전도
삶의 목표와 질서가 무너진 그는 설흔 둘 젊은 나이에 운명.

관동대지진 발생 혼란기에 학업 중퇴하고 귀국.
1924년 조부 광산 일을 도왔으나 광산업이 실패,
가세가 크게 기울자 처가가 있던 구성군으로 이사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지국 개설후 경영(1926) 실패,
1930년대 작품활동 등한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
1934년 12월 24일 8시에 고향 곽산에서 아편 음독 자살.

평북 정주 곽산 남산리에서 출생
처절한 애수를 담고 있는 소월의 시.
그 처절한 애수는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김소월은 진달래꽃 주술같은 사랑을 했던듯.'

1920년 '낭인(浪人)의 봄.'으로 문단데뷔 후 1922년 '진달래꽃'
1923년 민족 혼이 담긴 시를 발표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에서 채란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소월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채란과 깊은 관계.'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불멸의 시 작품들.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으로 이사 후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대표작은 <진달래꽃>

'김소월은 채란과 헤어진 후 죽도록 못잊은 듯..'

채란은 진주 권번사에서 손꼽는 미모의 여류시인이자 기생.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란 채란.
13살 때 편모가 개가밑천을 장만하려고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강산,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
연변에서 소월을 만나 사랑을 나눈 것으로 추정.
소월이 주옥 같은 시를 쏟아낼 만큼, 깊은 관계.

채란은 김소월 시인의 '불멸의 시' <진달래꽃>의 여주인공.
한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방황한 채란.
바라만 보아도 곱지만 하도 흔해 손쉽게 꺽을 수 있는 진달래꽃.

온몸으로 님을 반기듯 봄바람 타고 피어나 꺽여버리기도 하는 꽃.
채란은 진달래꽃 같은 신세라 그 꽃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듯.
그녀는 객지를 떠돌듯 남자의 품속을 돌며 주옥같은 시를 토해낸다.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 없는 몸으로 팔려 다닌 신세.
춤과 노래를 익히고, 고향이 그리울 때면 시로 마음을 달랜 듯.

조국을 잃어 버린 소월과 들병이 신세 채란의 만남.
서로 신세를 한탄하며 자학하듯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당시 소월의 시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나타나 있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 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들면 님.'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지금까지 알려졌다.
김소월의 불멸의 작 <진달래꽃>에는 채란의 심경도 잘 담겨있다.


님은 먼곳에..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곳에. ♬

노래 : 김추자. 조관우. 장사익.

채란은 몸 파는 기생이라 김소월을 사랑하면서도 붙잡지 못한 듯.
빼앗긴 조국 팔도강산에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진달래꽃.
<진달래 꽃> 시는 김소월을 민족시인이라 부르게 했던 불멸의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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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진달래 꽃.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멀리 떠나보내야 할 때, 그 가슴 아픈 마음.
이미 내 곁에서 떠났어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래서, 떠나가는 님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님이 가시는 무릎 걸음마다 진달래꽃을 뿌리며 고이 보내는 마음.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싶기에, 울고 싶어도 죽어도 아니 우는 마음.
김소월 詩人의 가슴 속에서도 님과 피맺힌 이별은 '한'이 되었나 보다.


이곳 유평리 대원사에서부터 노고단 문수골까지
반란의 역사로 숨진 2만 여명의 토벌군과 남부군.
이 詩로 이곳 못 다한 삶의 진혼들을 위로해 본다.

2004. 10.10. 법일스님 100 주년 탄신 추모제에 즈음하여
2004년 4 월 1일 생을 마감한 정순덕 여인 혼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