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
......................................................................쑥밭재.
....................................↙........................↖. /
.................................↙............................ >하봉....무재치기 폭포~~장당골
..............................↙................................/.....치밭목 산장.. 조개골..대원사↖..내원골
................국골.....↙.............*마야계곡....*중봉
....................↖......................................./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통천골..천왕샘..법천골...중산리
..........................↖................↙.........제석봉............................↗
......하동바위..........>백무동...............장터목 산장...산희샘......↗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무재치기 폭포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천왕봉 이름은..'상봉'.
'중봉'이란 이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듯 하다.
지리산에서 가장 지리산다운 봉우리를 꼽는다면 중봉.
천왕봉은 이미 환경 훼손으로 지리산다움을 상실.
연일 계속되는 일출 인파로 어느덧 신비감을 상실.
중봉은 아직 지리산 종주 인파의 발길조차 뜸한 곳.
지리산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 해발 1875 m 중봉(中峯)
대원사에서 치밭목 산장 지나 천왕봉 마주보이는 곳이 중봉.
지리산의 10 경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지리산 제 1의 비경이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2km, 북쪽 하봉 능선과 써리봉 능선을 형성.
써리봉 능선은 국수봉에서 구곡산으로 이어지는 일명 '황금 능선'
산세가 험하고 원시림과 울창한 산죽 때문에 등산로 찾기가 어렵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능선을 분기점으로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중봉골
중봉골을 일컬어 '지리산 최후의 비경 또는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른다.
현재 이 계곡에는 지리산에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을 내걸은 곳.
등산로를 찾으려 해도 잘 찾아 내기가 힘들도록 해 놓은 인적드문 곳.
'처녀의 순결'같은 태고의 신비가 자연 그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
처녀림은 인적의 흔적이 없는 원시림을 뜻한다.
잡목과 가시덩굴이 피부를 할퀴며 앞을 막는 숲.
자칫 잘못 들어서면 길 잃고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하여, 처녀림이란 곳은 들어서지 않는 것이 상책.
산에서 위험한 곳의 지명은 거의 여성에 비유한다.
중봉의 처녀림은 산신령도 길을 잃는다는 험한 산세.
중봉 남쪽으로 내려서면 미답의 마야계곡.
중봉 북쪽으로 내려서면 죽음의 칠선계곡.
중봉 능선에서는 좌우 어느 쪽 하산도 위험.
중봉 능선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참으로 아름답다.
중봉 일출을 감상하려면 치밭목 산장 일박이 바람직.
새벽 일찍 치밭목산장을 나서면 중봉에서 해가 떠오른다.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된 천왕봉에서의 일출.
그것보다는 차라리 중봉의 일출을 권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어느 곳도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치, 태고의 숨결 속에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듯 한, 곳.
워낙 인적이 드물어 누구인가라도 사람이 그리워지는 외딴 곳.
인간은 홀로 동떨어져 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하봉(1781m).
산청에서 바라보이는 산세에서 비롯된 지명..'하봉.'
지리산을 하봉 중봉 상봉으로 부를 만한 곳은.. 산청.
옛부터 산청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은 지리산이었던 듯.
'상봉, 중봉, 하봉, 그리고 산청 사람들..'
대부분의 산은 상봉을 중심으로 봉우리 군락을 이룬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이 줄 이어 연결.
하봉은 낮다는 뜻의 봉우리 이름이지만 결코 낮지 않다.
천왕봉 아래 중봉(1875m)처럼 명성을 뽐내지 못하는 하봉.
그러나, 하봉은 그 산세와 빼어난 경관은 지리산 중 으뜸.
지리산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험준한 산세라 인적 뜸한 곳.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의 산세를 이어 두류봉으로 연결
산 아래 추성동마을 뒷산인 추성산성터까지 용틀임한다.
하봉 능선의 웅장함이 잘 보이는 남원시 산내면 삼거리
(인월에서 뱀사골로 가다보면 실상사와 마천방면 삼거리)
마치, 지리산 정기가 꿈틀거리는 형세를 느낄 수 있다.
추성동에서 중봉 거쳐 천왕봉을 잇는 능선도 마찬가지.
험한 산세를 오르려면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무리하지 않고 등반할 수 있는 하봉 능선도 있다.
추성동 - 하봉 - 국골 또는 얼음골 - 추성동 하산
또는 쑥발재, 치밭목산장, 조개골 통해 대원사 하산.
추성동 마을 뒷산 산등성이 따라 오르면 영리봉이다.
추성산성터가 있고 국골과 얼음골 사이에 있는 능선.
추성산성터는 가락국의 역사적인 체취가 서려있는 곳.
해발 1432m의 두류봉 능선은 인적 드문 곳이었지만
요즘은 등산로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라 한다.
그러나, 급경사때문에 초반부터 체력소모를 요구한다.
두류봉 능선은 지리산 주능선과 산줄기가 보이는 전망대.
지리산 1백리 주능선이 하눈에 보이는 위치에 솟은 봉우리.
천왕봉 -중봉 - 하봉의 암릉과 험준한 산세에 탄복할 정도.
여기에 칠선계곡과 국골을 빚은 산세와 원시림은 감동적.
멀리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파노라마
그러나, 하봉은 정상이 숲속 터널과 아슬아슬한 바위 벼랑뿐
더 높은 중봉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
하여, 하봉이 하봉 임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봉에서는 천왕봉이 중봉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봉 능선은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특히 하봉 -중봉 구간은 이 코스의 마지막 절정.
험준한 벼랑과 비탈, 원시림을 맛 볼 수 있는 곳.
이 구간 중간에서 등산로는 치발목산장으로도 연결.
하봉능선 등반은 대개 하봉 정상을 목표로 산행한다.
중봉을 거칠 경우는 넉넉한 일정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
하봉까지 등반하고 국골 또는 얼음골 하산은 당일에 가능.
대략 6∼7시간이면 등반할 수 있는 짜릿한 암릉 등반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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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벗 하나 있었으면..- 도 종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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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추성리.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성을 쌓았다는 곳.
성의 이름 '추성'에서 유래된 마을의 이름, 추성리.
길조의 별을 볼 수 있는 마을이라 추성리라고도 한다.
<추성>은 추성리 산 93번지에 위치한 연대 미상의 성.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고 높이 10 여m 망석도 있다
지리산 하봉 아래에 있는 <고성>은 일명 박회성(朴回城)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는 설.
<고성>은 현재 사라졌고 흔적 만 일부 남아있다
추성동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가 득도하기 전
십년간 광주리(사투리 : 강어리)를 만들었다는 곳.
하여, 벽송사가 있는 마을의 지명은 '강어리점'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 함양분소 관할.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인 지리산 최고의 계곡.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칠선계곡은 7개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있는 선경
마천면 의탄에서 천왕봉까지 16km 거리 '죽음의 계곡.'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해 계곡과 동떨어진 등산로
추성- 용소 -두지터 - 추성 망바위 - 선녀탕 - 옥녀탕
- 비선담 - 칠선폭포 - 대륙폭포 - 삼층폭포 - 마폭포
가야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최후 항전처로 알려진 국골
지리산에서 제일 험하다는 칠선계곡 하류와 만나는 국골
추성리 주민들은 이곳 가야국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용유담.
함양군 휴천면과 마천면 경계지점에 용유담이 있다.
옛 선인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던 지리산 명승지
유림에서 마천을 경유해 백무동 가는 지방도로 아래
용유교 도로 위에서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
물살이 쉬엄 쉬엄 흐른다고 하여 명명된 휴천.
물살이 말 달리듯 흐른다고 하여 명명된 마천.
휴천과 마천이 장구한 세월동안 빚어놓은 용유담.
신이 빚어 낸 조각 예술인듯., 아름다움의 극치.
1558년 남명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
쌍계사 청학동 신흥사 칠불암 등을 다녀갔던 기록.
덕산동, 청학동 신응동, 용유동 각각 세 번
백운동 한 번, 장항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용이 놀던 곳이라는 뜻의 ‘용유동(龍遊洞)’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명이 3번 찾았던 곳.
지리산 북쪽의 백무동 계곡, 삼정계곡과
전북 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해 엄천강
이 일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 용유동
그 중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 지점
기암괴석이 일대 장관을 이루는 곳이 용유담
조선조 김일손이 이곳에 들러 절경을 감탄
그의 기행문 속두류록에 용유담에 관한 기록.
“시냇물 북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용유담에 이르렀다.
용유담은 남북으로 뻗은 못인데,
깊고 그윽하며 기이하고 빼어나서
속세와 천리나 떨어진 듯하였다.”
남명을 본받고자 했던 함양 선비들은
남명이 다녀간 흔적을 찾고 싶어했다.
용유담가 바위에 ‘남명 선생이 다녀간 곳’
'文貞公南冥曺先生 장구소'라 새겨진 글귀.
김일손, 정여창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용유담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
영남학파 거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란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록.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보내면 그 나귀가 엄천사로 가서
식료품과 생활 필수품을 싣고 왔다는.,구전.
그 나귀가 용유담 가에 와서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 둘때 용 아홉 마리가 싸움을 시작
장기에 몰두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는 곳이., 용유담
그곳에 나귀 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남명이 다녀갔다고 새긴 바위 옆에 龍游潭’글귀.
이조시대 용유담은 선비들의 풍류 장소였던 곳.
용유담은 마천과 휴천 경계인 '휴천면 송전리'의 호수.
지리산 북쪽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삼정계곡과 뱀사골.
그 계곡물이 엄천강을 이루고 기암괴석 폭포 별천지 조성.
용유담 서편은 청아한 물빛 속에 비치는 반석
신선의 경지인 듯 스스로 황홀감에 도취되게 하는 절경.
강 동편 가교와 고기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폭의 그림
통발 앞 날뛰는 고기를 잡는 어부의 작은 배와 저녁 노을.
'용유담 일대에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전설들.'
옛 조상들의 얼과 숨결이 담겨 있는 듯 여겨진다.
하여, 용유담 일대에 흩어진 전설을 모아 소개한다.
지금은 거의 그곳 주민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져간다.
용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전설속 신성한 동물.
몸통은 뱀과 비슷하며 비늘이 있고 두 개의 뿔이 있다.
사슴을 닯은 뿔, 소를 닮은 귀, 돼지를 닮은 코의 형상.
깊은 못이나 바다에 살며 하늘을 날고 비구름을 부른다.
용왕은 용의 무리를 거느리며 지배하고 다스리는 우두머리
연못이나 깊은 강에서 살거나 노는 곳 이름이 용소나 용유담
용유담은 전설속의 용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호수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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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강변 마적에 마적도사가 마적사를 짓고 살았다.
마적도사는 기르는 당나귀 등에 쪽지를 써 장을 보았다.
마적사 부식이 떨어지면 당나귀는 오도재를 넘어 광동장.
이때 장사꾼들은 쪽지에 적힌 생필품을 당나귀 등에 실었다.
당나귀가 용유담 나귀바위에서 울면 아홉 용이 다리를 놓았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장기를 두는데 용유담이 거칠게 물결을 쳤다.
눈먼 용 한 마리를 남겨두고 여덟 마리 용들이 아귀다툼
서로 먼저 여의주를 물고 등천하겠다고 싸운 때문이었다.
마적도사는 장기에 정신 팔려 당나귀 울음을 듣지 못했다.
나귀는 무거운 짐을 싣고 울부짖다가 지쳐 쓰러져 죽었다.
이 때 나귀가 죽어 피바위가 된 곳 이름이 바로 나귀바위.
마적도사는 울화를 참지 못하여 장기판을 냅다 팽겨쳤는데
한쪽은 마적에 남아있고 다른 한쪽은 용유담 건너 나귀바위.
이 때 마적도사는 눈먼 용 만 남기고 여덟마리는 쫓아버렸다.
먼 훗날 송전리 주민들은 마적에 새 길을 내야했다.
이 나귀바위를 폭파하지 않고는 새 길을 낼 수 없었다.
주민들은 부득불 이곳을 폭파하자 말방울 16개가 나왔다.
바로 1300여년 전 마적도사의 당나귀 말방울.
신라 무열왕 기미(659년)년 법화사와 같이 창건한 마적사
마적도사가 절을 떠나던 날 배나무 한 그루를 절에 심었다.
이것이 죽으면 나도 죽을 줄 알아라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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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맑은 물에는 등무늬가 스님의 가사같은 물고기가 산다.
용유담에 서식하는 가사어는 여름에 배암사골 달궁못으로 이주.
길을 가던 대사가 큰 바위틈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개가 목욕을 즐기고 있다가 선녀로 둔갑했다.
원래 선녀봉이라 부르던 이곳은 그 일이 있은 후 비녀봉
그곳 샘은 견습정이고 훗날 그곳에 지은 절 이름은 선녀암.
백련동은 고려말 개성유수 이억년이 남은 여생을 보냈던 곳.
원나라 내정간섭으로 고려 국정이 어지러운 것을 한탄한 탓.
이때 함께 은둔했던 이백년 이름을 본따 백년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흰백자와 연꽃 연자를 써서 백련으로 불리우고 있다.
백련암은 이백년과 이억년 형제의 명복을 빌기 위한 암자이다.
견불마을은 신라시대 견불사에서 유래.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선녀굴
이 일대는 누워있는 부처님의 옆얼굴 모습
용유담 건너편 마을에서 자세히 보여 견불동
송대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처님 얼굴.
불교신자 아니어도 염불이 절로 나오는 산세.
지리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동호마을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 엄천골의 대표적 마을.
엄천이란 불교의 계율을 엄하게 계혜한다는 뜻에서 비롯
이 고을을 엄천골이라 하고 절 앞 흐르는 냇물을 엄천강
한남마을은 세종대왕 열두번째 아들 '한남군'의 유배지.
1456년 단종복위 실패로 성상문 박팽년 하위 사륙신 처형
계유정란 당시 영풍군과 함께 한남마을 앞 새우섬에 유배
한남마을 가대지라는 곳은 한남군이 거처하던 집터.
누구든지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재앙을 겪어 패망.
지금은 집터의 주춧돌만 남아있어 슬픈 역사를 대변.
양발을 벌려 새끼줄을 꼬는 사람의 모양인 신들바위
마치 중이 배낭을 지고 가는 형국 같아 보이기도 한다.
엄천사의 많은 중들이 이 바위를 깨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엄천사는 액운으로 파란을 겪어야만 했었다.
결국 엄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현재 신들바위에는 그당시 중들이 깬 파석들만이 남아 있다.
기암터 뒷산 8부 능선에 높이 30m 남성 성기같은 선바위.
산청군 삼가면 역골 처녀가 일생 사랑하며 살던 바위란다.
한양에서 지리산 유람하려면, 거치게 되는 함양.
지리산 들머리 함양 직전에 만나는 화림동계곡
화림동계곡에서 용유담까지는 풍류 문화의 산실.
안의 삼동 중에서 화려한 자연미를 간직한 곳이 화림동.
화림동은 안의에서 전북 장수로 통하는 국도 26호선 따라
4km를 가면 물가에 아담한 정자 '농월정'이 있는 마을이다.
'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팔담팔정을 이룬 화림동.'
화림동은 농월정을 비롯 4개의 오래된 정자가 남아 있는 곳.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선비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가는 명소이다.
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농월정의 관광편의 시설들
2천여명이 사용할 수 있는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
화림동에서는 더덕구이, 백숙, 메기매운탕 등등이 별미.
벽송사.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철선계곡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벽송사사적기〉에 의하면 1520년(중종 15)에 창건
1950. 6·25 전쟁 때 불탄 후 중건한 것이 현재 모습.
천왕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독특한 능선길.
이곳 얼음터 오른쪽엔 엄천강의 용류담, 왼쪽 광점동마을.
광주리점이 있었다는 마을과 벽송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칠선계곡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
보광전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리고 그 앞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절이고 창건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50m 후방 옛 절터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
높이 3.5m이고 보물 474호인탑이 사찰의 창건 시기를 말한다.
1520년(이조 중종 15 년))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해 <벽송사>
'덕유산과 지리산을 잇는 위치에 있는.. 벽송사.'
1950,6.25 사변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이때 불타 소실된 후 중건된 사찰엔 다양한 표정의 나무장승들
순천 선암사 앞에 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지하에 1m 묻혀 있고, 둑을 쌓은 높이가 1m.
왼쪽 장승은 '금호장군'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한다.
두 장승은 사천왕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벽송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유달리 장승들이 많이 서 있고 입구에도 천하장사 금강장사를 대신해 왕 주먹코 장승이 있다. |
여자장승은 꼭 다문 합죽이 입, 옴폭한 보조개, 불에탄 머리
남자장승은 짱구, 왕방울 눈알, 얼굴 절반 크기의 우뚝한 코
참나무 조각 얼굴은 소박하면서도 질퍽하고 위압적인 표정.
신재효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가루지기"(변강쇠타령)
그 주무대가 벽송사 일대 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장승 뽑아 불때고 따뜻한 방에서 옹녀와 놀아난 변강쇠.
함양 장승신은 한양 노량진의 우두머리 장승을 찾아간다.
우두머리 장승은 팔도의 수만 장승을 새남터에 모이게 한다.
결국, 변강쇠는 8백 가지 병을 얻고 함양 땅에서 죽고야 만다.
'<가루지기>의 변강쇠가 죽은 곳이 벽송사 장승 터.'
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은 옹녀와 변강쇠의 상징이다.
사람들의 도에 넘치는 애욕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장승.
예전에 그곳에 수많은 장승이 있었던 터 였음을 알려준다.
.............벽송사의 창건 설화.................................
460년 전, 전북 부안군 송씨 가문에서 태어난 송지암.
10세 전에 사서삼경을 읽었고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
장군의 칭호를 받고 변방에 나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격전지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전쟁에 염증.'
인생 무상을 실감하고 계룡산에 들어가 불교수행에 정진.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 등지를 거치면서 수도를 쌓던 중
법계 정심대사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57세 되던 해.
그 무렵 법계대사는 이조 조정의 척불의 화를 피해
싸리나무 광주리를 만들어 내다 팔고 있던 터였다.
허구헌날 송지암에게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킬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자 3년간 잡일 후 떠난다.
"가고 오는 것은 자유이니 마음대로 하라"
송지암은 하산하다가 그 말을 되새기며 돌아온다.
법계대사 앞에 무릎 꿇고 경솔함을 사죄하며 득도.
물욕과 욕망이 사라지자 만물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벽송대사가 득도한지 3개월 후 법계 정심대사는 운명.
그후 벽송이 많은 제자들 마음 밭에 법비를 내린 벽송사.
................................................................................
벽송사 가는길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가홍교 앞에서 1084번 지방도로
유림, 함양 방면으로 2.7km 가면 오른쪽 아치형 의탄교
의탄교를 건너 시멘트길로 1.8km 가면 추성동 칠선산장
삼거리 왼쪽의 비포장길을 따라 1.2km 가면 벽송사이다.
승용차는 벽송사까지, 대형버스는 칠선산장 주변에 주차.
인월에서 의탄리 의탄교 앞까지는 하루 5회 버스가 다닌다.
(인월 -> 의탄리 7:00, 9:40, 15:00, 15:50, 19:30)
마천에서 함양 까지는 1시간 간격으로 군내 버스.
서암정사.
파출소 순찰차와 택시가 지프형 자동차인 함양군 마천면
88고속도로 지리산 IC 나와 60번 지방도 타고 칠선계곡 행.
변강쇠 타령의 발상지인 백장공원(변강쇠 옹녀공원)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개울 건너 논 가운데 느티나무와 실상사.
실상사는 수경스님이 주석해 계시는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전북 부안 새만금 갯벌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먼길을 삼보일배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무려 800리 길에서의 고행.
골수와 같은 땀을 퍼붓다가 결국 실신까지 하였던 수경스님이다.
실상사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한다.
60번 지방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함양군 마천
마천면은 지리산의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들머리이다.
마천 면소재지를 지나 아치형 다리를 건너 오른쪽 계곡
평평한 바위들이 물에 발 담구고 앉아 쉬라고 유혹한다.
산비탈 밭두렁 가지런한 벌통에 지리산 토종꿀의 달콤함
흘끔흘끔 눈맛을 보며 계곡따라 올라가면 벽송사 안내판.
지리산 IC부터 이곳까지는 약 18Km 거리가 되는 듯 하다.
서암정사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
돌기둥 뒤쪽 사천왕이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다
절에 다니다 보면 늘 보는 험상궂고 무시무시한 사천왕.
칼이나 창을 든 사천왕 조각
큰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부터 서암정사의 색다른 경이로움이 눈길을 끈다.
비탈길을 힘겹게 승용차로 오르면 넓은 주차장이 반긴다.
주차장에서 200 m 비탈을 올라 좌측에 <同歸大海一味水>
우측에 <百年江河萬溪流>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기둥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가면 다시 두 개의 돌기둥이 나타난다.
왼쪽 기둥엔 <調御三千界>, 오른쪽 돌기둥엔 <摩詞大法王>
이 돌기둥들이 일주문이며 해탈문이나 불이문에 해당되는 듯.
참배객 가는 길이란 안내판 따라 오른쪽 절벽에 사천왕 조각.
키가 5m도 훨씬 넘는 우람한 사천왕상들이 우측 절벽에 도열.
보통 절의 사천왕은 나란히 둘씩 마주보고 선 형상과 다르다.
이곳 사천왕은 큰 자연바위 위에 나란히 조각.
무지개처럼 생긴 대방광문으로 들어서면 한옥 같은 미타전.
대방광문이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협곡 같은 입구 따라 몇 걸음 걸으면 화엄의 세계로 들어선다.
주변이 온통 큼직한 바위로 이루어진 곳에 보이는 한옥 건물.
여염집 사랑채 같은 그런 한옥건물 벽에 '방하제연'이란 팻말
아직 버리지 못한 세속, 근심, 미련과 시기심을 떨구라는 의미.
미타전 편액이 붙은 한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극락전
봉긋한 봉우리 형태의 언덕에 굴법당으로 들어가면 굴극락전
안양문(安養門)을 열고 굴법당으로 들어서면 굴속에 있는 법당.
자연 동굴 바위벽과 천장 사방에 온통 부처님과 불보살 조각
굴법당 극락전은 환희심이 넘칠 정도로 굴 전체가 섬세한 조각
아미타 부처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그리고 8대 보살
10대 제자, 나한, 사천왕 등
용, 연꽃 가릉빈가(迦陵頻伽)
굴법당 벽과 천장바위에도 조각.
빈틈없이 조각으로 메운 바위굴.
20 세기와 21세기 양 세기에 걸친 조각들은 걸작 중의 걸작.
장엄함, 정교함과 섬세함이 석굴암보다 더 빼어난 듯 보인다.
지장보살의 지팡이만 보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섬세한 조각.
지장보살님의 손에 들려있는 구슬은 유난히 검은 색 광채.
그 옥구슬은 다른 돌로 가공한 것이 아닌 동굴의 원석이다.
마천 석재는 옥이라 곱게 갈아주면 옥 특유의 광택이 난다
굴법당이 우리나라에서 서암정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서암정사의 굴법당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서암정사의 모든 불상과 조각품들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벽.
돌을 붙이거나 덧댄 흔적이 없는 암굴.
바위벽 제일 위쪽에 비로자나 부처님,
그리고 아래 세 개의 바위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및 선재동자가 조각되어 있다.
극락전을 나와 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비로전이 있다.
맞추기 블록을 쌓아 놓은 듯 놓여진 엄청난 규모의 바위들,
그리고 그 바위에 새겨진 제불 보살들의 섬세한 미소와 표정!
산신령이 거느린 호랑이의 콧수염이 살아 움직이는 듯.
독성님 옆 꽃사슴의 숨결소리가 들릴 듯 섬세한 조각들.
서암정사를 만들기 위해 원력을 모은 원웅(元應)스님
10년간 서암정사 바위벽 조각에 몰두한 석공 홍덕희씨.
1991년 33세에 서암에 들어와 44세에 햇볕을 구경한 석공.
현재 서암정사 남쪽 사천방면에서 또 다른 사찰에서 조각 중.
서암정사는 1960년 초 벽송사 주지 원웅스님의 40년 결정체.
화엄도량 서암에서 소중한 성보는 80권의 화엄경 금니사경전
원웅스님이 85년에 시작해 12년만인 1997년에 완성한 경전이다.
스님이 참선 중 감지(紺紙)에 금분으로 옮겨 쓴 화엄경 60만 자
서암정사 돌탑 저 아래로 추성리와 계곡이 한눈에 보인다
서암정사에 깃 든 불심과 신도들의 숨은 정성이 놀라웁다.
법당은 아미타불을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 보처로는 관세음보살
우 보처는 대세지 보살님을 모셨다 .
서암정사의 지장보살님
대의왕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
용왕전은 대웅전 뒷 편에 ~~
서암정사의 산신각도 바위에 직접 조각으로 모셨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비로전
산신각과 비로전을 들어가는 문도 역시 돌문이다.
중봉.
......................................................................쑥밭재.
....................................↙........................↖. /
.................................↙............................ >하봉....무재치기 폭포~~장당골
..............................↙................................/.....치밭목 산장.. 조개골..대원사↖..내원골
................국골.....↙.............*마야계곡....*중봉
....................↖......................................./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통천골..천왕샘..법천골...중산리
..........................↖................↙.........제석봉............................↗
......하동바위..........>백무동...............장터목 산장...산희샘......↗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무재치기 폭포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천왕봉 이름은..'상봉'.
'중봉'이란 이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듯 하다.
지리산에서 가장 지리산다운 봉우리를 꼽는다면 중봉.
천왕봉은 이미 환경 훼손으로 지리산다움을 상실.
연일 계속되는 일출 인파로 어느덧 신비감을 상실.
중봉은 아직 지리산 종주 인파의 발길조차 뜸한 곳.
지리산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 해발 1875 m 중봉(中峯)
대원사에서 치밭목 산장 지나 천왕봉 마주보이는 곳이 중봉.
지리산의 10 경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지리산 제 1의 비경이다.
중봉은 천왕봉에서 2km, 북쪽 하봉 능선과 써리봉 능선을 형성.
써리봉 능선은 국수봉에서 구곡산으로 이어지는 일명 '황금 능선'
산세가 험하고 원시림과 울창한 산죽 때문에 등산로 찾기가 어렵다.
천왕봉에서 시작된 능선을 분기점으로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중봉골
중봉골을 일컬어 '지리산 최후의 비경 또는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른다.
현재 이 계곡에는 지리산에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을 내걸은 곳.
등산로를 찾으려 해도 잘 찾아 내기가 힘들도록 해 놓은 인적드문 곳.
'처녀의 순결'같은 태고의 신비가 자연 그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
처녀림은 인적의 흔적이 없는 원시림을 뜻한다.
잡목과 가시덩굴이 피부를 할퀴며 앞을 막는 숲.
자칫 잘못 들어서면 길 잃고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하여, 처녀림이란 곳은 들어서지 않는 것이 상책.
산에서 위험한 곳의 지명은 거의 여성에 비유한다.
중봉의 처녀림은 산신령도 길을 잃는다는 험한 산세.
중봉 남쪽으로 내려서면 미답의 마야계곡.
중봉 북쪽으로 내려서면 죽음의 칠선계곡.
중봉 능선에서는 좌우 어느 쪽 하산도 위험.
중봉 능선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참으로 아름답다.
중봉 일출을 감상하려면 치밭목 산장 일박이 바람직.
새벽 일찍 치밭목산장을 나서면 중봉에서 해가 떠오른다.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된 천왕봉에서의 일출.
그것보다는 차라리 중봉의 일출을 권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어느 곳도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치, 태고의 숨결 속에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듯 한, 곳.
워낙 인적이 드물어 누구인가라도 사람이 그리워지는 외딴 곳.
인간은 홀로 동떨어져 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하봉(1781m).
산청에서 바라보이는 산세에서 비롯된 지명..'하봉.'
지리산을 하봉 중봉 상봉으로 부를 만한 곳은.. 산청.
옛부터 산청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은 지리산이었던 듯.
'상봉, 중봉, 하봉, 그리고 산청 사람들..'
대부분의 산은 상봉을 중심으로 봉우리 군락을 이룬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이 줄 이어 연결.
하봉은 낮다는 뜻의 봉우리 이름이지만 결코 낮지 않다.
천왕봉 아래 중봉(1875m)처럼 명성을 뽐내지 못하는 하봉.
그러나, 하봉은 그 산세와 빼어난 경관은 지리산 중 으뜸.
지리산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험준한 산세라 인적 뜸한 곳.
하봉은 천왕봉과 중봉의 산세를 이어 두류봉으로 연결
산 아래 추성동마을 뒷산인 추성산성터까지 용틀임한다.
하봉 능선의 웅장함이 잘 보이는 남원시 산내면 삼거리
(인월에서 뱀사골로 가다보면 실상사와 마천방면 삼거리)
마치, 지리산 정기가 꿈틀거리는 형세를 느낄 수 있다.
추성동에서 중봉 거쳐 천왕봉을 잇는 능선도 마찬가지.
험한 산세를 오르려면 극심한 체력소모를 감당해야 한다.
무리하지 않고 등반할 수 있는 하봉 능선도 있다.
추성동 - 하봉 - 국골 또는 얼음골 - 추성동 하산
또는 쑥발재, 치밭목산장, 조개골 통해 대원사 하산.
추성동 마을 뒷산 산등성이 따라 오르면 영리봉이다.
추성산성터가 있고 국골과 얼음골 사이에 있는 능선.
추성산성터는 가락국의 역사적인 체취가 서려있는 곳.
해발 1432m의 두류봉 능선은 인적 드문 곳이었지만
요즘은 등산로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라 한다.
그러나, 급경사때문에 초반부터 체력소모를 요구한다.
두류봉 능선은 지리산 주능선과 산줄기가 보이는 전망대.
지리산 1백리 주능선이 하눈에 보이는 위치에 솟은 봉우리.
천왕봉 -중봉 - 하봉의 암릉과 험준한 산세에 탄복할 정도.
여기에 칠선계곡과 국골을 빚은 산세와 원시림은 감동적.
멀리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의 파노라마
그러나, 하봉은 정상이 숲속 터널과 아슬아슬한 바위 벼랑뿐
더 높은 중봉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
하여, 하봉이 하봉 임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봉에서는 천왕봉이 중봉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봉 능선은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특히 하봉 -중봉 구간은 이 코스의 마지막 절정.
험준한 벼랑과 비탈, 원시림을 맛 볼 수 있는 곳.
이 구간 중간에서 등산로는 치발목산장으로도 연결.
하봉능선 등반은 대개 하봉 정상을 목표로 산행한다.
중봉을 거칠 경우는 넉넉한 일정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
하봉까지 등반하고 국골 또는 얼음골 하산은 당일에 가능.
대략 6∼7시간이면 등반할 수 있는 짜릿한 암릉 등반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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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벗 하나 있었으면..- 도 종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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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추성리.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성을 쌓았다는 곳.
성의 이름 '추성'에서 유래된 마을의 이름, 추성리.
길조의 별을 볼 수 있는 마을이라 추성리라고도 한다.
<추성>은 추성리 산 93번지에 위치한 연대 미상의 성.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고 높이 10 여m 망석도 있다
지리산 하봉 아래에 있는 <고성>은 일명 박회성(朴回城)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는 설.
<고성>은 현재 사라졌고 흔적 만 일부 남아있다
추성동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가 득도하기 전
십년간 광주리(사투리 : 강어리)를 만들었다는 곳.
하여, 벽송사가 있는 마을의 지명은 '강어리점'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 함양분소 관할.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인 지리산 최고의 계곡.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칠선계곡은 7개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있는 선경
마천면 의탄에서 천왕봉까지 16km 거리 '죽음의 계곡.'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해 계곡과 동떨어진 등산로
추성- 용소 -두지터 - 추성 망바위 - 선녀탕 - 옥녀탕
- 비선담 - 칠선폭포 - 대륙폭포 - 삼층폭포 - 마폭포
가야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최후 항전처로 알려진 국골
지리산에서 제일 험하다는 칠선계곡 하류와 만나는 국골
추성리 주민들은 이곳 가야국의 역사를 들려주기도 한다.
용유담.
함양군 휴천면과 마천면 경계지점에 용유담이 있다.
옛 선인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던 지리산 명승지
유림에서 마천을 경유해 백무동 가는 지방도로 아래
용유교 도로 위에서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
물살이 쉬엄 쉬엄 흐른다고 하여 명명된 휴천.
물살이 말 달리듯 흐른다고 하여 명명된 마천.
휴천과 마천이 장구한 세월동안 빚어놓은 용유담.
신이 빚어 낸 조각 예술인듯., 아름다움의 극치.
1558년 남명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
쌍계사 청학동 신흥사 칠불암 등을 다녀갔던 기록.
덕산동, 청학동 신응동, 용유동 각각 세 번
백운동 한 번, 장항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용이 놀던 곳이라는 뜻의 ‘용유동(龍遊洞)’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명이 3번 찾았던 곳.
지리산 북쪽의 백무동 계곡, 삼정계곡과
전북 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해 엄천강
이 일대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 용유동
그 중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 지점
기암괴석이 일대 장관을 이루는 곳이 용유담
조선조 김일손이 이곳에 들러 절경을 감탄
그의 기행문 속두류록에 용유담에 관한 기록.
“시냇물 북쪽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용유담에 이르렀다.
용유담은 남북으로 뻗은 못인데,
깊고 그윽하며 기이하고 빼어나서
속세와 천리나 떨어진 듯하였다.”
남명을 본받고자 했던 함양 선비들은
남명이 다녀간 흔적을 찾고 싶어했다.
용유담가 바위에 ‘남명 선생이 다녀간 곳’
'文貞公南冥曺先生 장구소'라 새겨진 글귀.
김일손, 정여창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
용유담은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
영남학파 거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란 김일손의 속두류록 기록.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보내면 그 나귀가 엄천사로 가서
식료품과 생활 필수품을 싣고 왔다는.,구전.
그 나귀가 용유담 가에 와서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 둘때 용 아홉 마리가 싸움을 시작
장기에 몰두하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는 곳이., 용유담
그곳에 나귀 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남명이 다녀갔다고 새긴 바위 옆에 龍游潭’글귀.
이조시대 용유담은 선비들의 풍류 장소였던 곳.
용유담은 마천과 휴천 경계인 '휴천면 송전리'의 호수.
지리산 북쪽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삼정계곡과 뱀사골.
그 계곡물이 엄천강을 이루고 기암괴석 폭포 별천지 조성.
용유담 서편은 청아한 물빛 속에 비치는 반석
신선의 경지인 듯 스스로 황홀감에 도취되게 하는 절경.
강 동편 가교와 고기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폭의 그림
통발 앞 날뛰는 고기를 잡는 어부의 작은 배와 저녁 노을.
'용유담 일대에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전설들.'
옛 조상들의 얼과 숨결이 담겨 있는 듯 여겨진다.
하여, 용유담 일대에 흩어진 전설을 모아 소개한다.
지금은 거의 그곳 주민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져간다.
용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전설속 신성한 동물.
몸통은 뱀과 비슷하며 비늘이 있고 두 개의 뿔이 있다.
사슴을 닯은 뿔, 소를 닮은 귀, 돼지를 닮은 코의 형상.
깊은 못이나 바다에 살며 하늘을 날고 비구름을 부른다.
용왕은 용의 무리를 거느리며 지배하고 다스리는 우두머리
연못이나 깊은 강에서 살거나 노는 곳 이름이 용소나 용유담
용유담은 전설속의 용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호수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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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강변 마적에 마적도사가 마적사를 짓고 살았다.
마적도사는 기르는 당나귀 등에 쪽지를 써 장을 보았다.
마적사 부식이 떨어지면 당나귀는 오도재를 넘어 광동장.
이때 장사꾼들은 쪽지에 적힌 생필품을 당나귀 등에 실었다.
당나귀가 용유담 나귀바위에서 울면 아홉 용이 다리를 놓았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장기를 두는데 용유담이 거칠게 물결을 쳤다.
눈먼 용 한 마리를 남겨두고 여덟 마리 용들이 아귀다툼
서로 먼저 여의주를 물고 등천하겠다고 싸운 때문이었다.
마적도사는 장기에 정신 팔려 당나귀 울음을 듣지 못했다.
나귀는 무거운 짐을 싣고 울부짖다가 지쳐 쓰러져 죽었다.
이 때 나귀가 죽어 피바위가 된 곳 이름이 바로 나귀바위.
마적도사는 울화를 참지 못하여 장기판을 냅다 팽겨쳤는데
한쪽은 마적에 남아있고 다른 한쪽은 용유담 건너 나귀바위.
이 때 마적도사는 눈먼 용 만 남기고 여덟마리는 쫓아버렸다.
먼 훗날 송전리 주민들은 마적에 새 길을 내야했다.
이 나귀바위를 폭파하지 않고는 새 길을 낼 수 없었다.
주민들은 부득불 이곳을 폭파하자 말방울 16개가 나왔다.
바로 1300여년 전 마적도사의 당나귀 말방울.
신라 무열왕 기미(659년)년 법화사와 같이 창건한 마적사
마적도사가 절을 떠나던 날 배나무 한 그루를 절에 심었다.
이것이 죽으면 나도 죽을 줄 알아라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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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맑은 물에는 등무늬가 스님의 가사같은 물고기가 산다.
용유담에 서식하는 가사어는 여름에 배암사골 달궁못으로 이주.
길을 가던 대사가 큰 바위틈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개가 목욕을 즐기고 있다가 선녀로 둔갑했다.
원래 선녀봉이라 부르던 이곳은 그 일이 있은 후 비녀봉
그곳 샘은 견습정이고 훗날 그곳에 지은 절 이름은 선녀암.
백련동은 고려말 개성유수 이억년이 남은 여생을 보냈던 곳.
원나라 내정간섭으로 고려 국정이 어지러운 것을 한탄한 탓.
이때 함께 은둔했던 이백년 이름을 본따 백년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흰백자와 연꽃 연자를 써서 백련으로 불리우고 있다.
백련암은 이백년과 이억년 형제의 명복을 빌기 위한 암자이다.
견불마을은 신라시대 견불사에서 유래.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선녀굴
이 일대는 누워있는 부처님의 옆얼굴 모습
용유담 건너편 마을에서 자세히 보여 견불동
송대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처님 얼굴.
불교신자 아니어도 염불이 절로 나오는 산세.
지리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동호마을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 엄천골의 대표적 마을.
엄천이란 불교의 계율을 엄하게 계혜한다는 뜻에서 비롯
이 고을을 엄천골이라 하고 절 앞 흐르는 냇물을 엄천강
한남마을은 세종대왕 열두번째 아들 '한남군'의 유배지.
1456년 단종복위 실패로 성상문 박팽년 하위 사륙신 처형
계유정란 당시 영풍군과 함께 한남마을 앞 새우섬에 유배
한남마을 가대지라는 곳은 한남군이 거처하던 집터.
누구든지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재앙을 겪어 패망.
지금은 집터의 주춧돌만 남아있어 슬픈 역사를 대변.
양발을 벌려 새끼줄을 꼬는 사람의 모양인 신들바위
마치 중이 배낭을 지고 가는 형국 같아 보이기도 한다.
엄천사의 많은 중들이 이 바위를 깨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엄천사는 액운으로 파란을 겪어야만 했었다.
결국 엄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현재 신들바위에는 그당시 중들이 깬 파석들만이 남아 있다.
기암터 뒷산 8부 능선에 높이 30m 남성 성기같은 선바위.
산청군 삼가면 역골 처녀가 일생 사랑하며 살던 바위란다.
한양에서 지리산 유람하려면, 거치게 되는 함양.
지리산 들머리 함양 직전에 만나는 화림동계곡
화림동계곡에서 용유담까지는 풍류 문화의 산실.
안의 삼동 중에서 화려한 자연미를 간직한 곳이 화림동.
화림동은 안의에서 전북 장수로 통하는 국도 26호선 따라
4km를 가면 물가에 아담한 정자 '농월정'이 있는 마을이다.
'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팔담팔정을 이룬 화림동.'
화림동은 농월정을 비롯 4개의 오래된 정자가 남아 있는 곳.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선비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가는 명소이다.
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농월정의 관광편의 시설들
2천여명이 사용할 수 있는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
화림동에서는 더덕구이, 백숙, 메기매운탕 등등이 별미.
벽송사.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철선계곡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벽송사사적기〉에 의하면 1520년(중종 15)에 창건
1950. 6·25 전쟁 때 불탄 후 중건한 것이 현재 모습.
천왕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독특한 능선길.
이곳 얼음터 오른쪽엔 엄천강의 용류담, 왼쪽 광점동마을.
광주리점이 있었다는 마을과 벽송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칠선계곡 추성리 입구에서 왼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
보광전 좌우에 건물 한 채씩, 그리고 그 앞에 일주문과 종루,
뒤쪽에 산신각이 있는 절이고 창건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50m 후방 옛 절터의 삼층석탑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
높이 3.5m이고 보물 474호인탑이 사찰의 창건 시기를 말한다.
1520년(이조 중종 15 년))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해 <벽송사>
'덕유산과 지리산을 잇는 위치에 있는.. 벽송사.'
1950,6.25 사변 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이 있다.
이때 불타 소실된 후 중건된 사찰엔 다양한 표정의 나무장승들
순천 선암사 앞에 있던 나무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지하에 1m 묻혀 있고, 둑을 쌓은 높이가 1m.
왼쪽 장승은 '금호장군' 오른쪽 장승은 '호법대장군'이라 한다.
두 장승은 사천왕 역할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벽송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유달리 장승들이 많이 서 있고 입구에도 천하장사 금강장사를 대신해 왕 주먹코 장승이 있다. |
여자장승은 꼭 다문 합죽이 입, 옴폭한 보조개, 불에탄 머리
남자장승은 짱구, 왕방울 눈알, 얼굴 절반 크기의 우뚝한 코
참나무 조각 얼굴은 소박하면서도 질퍽하고 위압적인 표정.
신재효의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가루지기"(변강쇠타령)
그 주무대가 벽송사 일대 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장승 뽑아 불때고 따뜻한 방에서 옹녀와 놀아난 변강쇠.
함양 장승신은 한양 노량진의 우두머리 장승을 찾아간다.
우두머리 장승은 팔도의 수만 장승을 새남터에 모이게 한다.
결국, 변강쇠는 8백 가지 병을 얻고 함양 땅에서 죽고야 만다.
'<가루지기>의 변강쇠가 죽은 곳이 벽송사 장승 터.'
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은 옹녀와 변강쇠의 상징이다.
사람들의 도에 넘치는 애욕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장승.
예전에 그곳에 수많은 장승이 있었던 터 였음을 알려준다.
.............벽송사의 창건 설화.................................
460년 전, 전북 부안군 송씨 가문에서 태어난 송지암.
10세 전에 사서삼경을 읽었고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
장군의 칭호를 받고 변방에 나가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격전지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전쟁에 염증.'
인생 무상을 실감하고 계룡산에 들어가 불교수행에 정진.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 등지를 거치면서 수도를 쌓던 중
법계 정심대사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57세 되던 해.
그 무렵 법계대사는 이조 조정의 척불의 화를 피해
싸리나무 광주리를 만들어 내다 팔고 있던 터였다.
허구헌날 송지암에게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킬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자 3년간 잡일 후 떠난다.
"가고 오는 것은 자유이니 마음대로 하라"
송지암은 하산하다가 그 말을 되새기며 돌아온다.
법계대사 앞에 무릎 꿇고 경솔함을 사죄하며 득도.
물욕과 욕망이 사라지자 만물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벽송대사가 득도한지 3개월 후 법계 정심대사는 운명.
그후 벽송이 많은 제자들 마음 밭에 법비를 내린 벽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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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가는길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가홍교 앞에서 1084번 지방도로
유림, 함양 방면으로 2.7km 가면 오른쪽 아치형 의탄교
의탄교를 건너 시멘트길로 1.8km 가면 추성동 칠선산장
삼거리 왼쪽의 비포장길을 따라 1.2km 가면 벽송사이다.
승용차는 벽송사까지, 대형버스는 칠선산장 주변에 주차.
인월에서 의탄리 의탄교 앞까지는 하루 5회 버스가 다닌다.
(인월 -> 의탄리 7:00, 9:40, 15:00, 15:50, 19:30)
마천에서 함양 까지는 1시간 간격으로 군내 버스.
서암정사.
파출소 순찰차와 택시가 지프형 자동차인 함양군 마천면
88고속도로 지리산 IC 나와 60번 지방도 타고 칠선계곡 행.
변강쇠 타령의 발상지인 백장공원(변강쇠 옹녀공원)을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개울 건너 논 가운데 느티나무와 실상사.
실상사는 수경스님이 주석해 계시는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전북 부안 새만금 갯벌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먼길을 삼보일배
새만금 갯벌의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무려 800리 길에서의 고행.
골수와 같은 땀을 퍼붓다가 결국 실신까지 하였던 수경스님이다.
실상사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에 속한다.
60번 지방도를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함양군 마천
마천면은 지리산의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들머리이다.
마천 면소재지를 지나 아치형 다리를 건너 오른쪽 계곡
평평한 바위들이 물에 발 담구고 앉아 쉬라고 유혹한다.
산비탈 밭두렁 가지런한 벌통에 지리산 토종꿀의 달콤함
흘끔흘끔 눈맛을 보며 계곡따라 올라가면 벽송사 안내판.
지리산 IC부터 이곳까지는 약 18Km 거리가 되는 듯 하다.
서암정사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
돌기둥 뒤쪽 사천왕이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다
절에 다니다 보면 늘 보는 험상궂고 무시무시한 사천왕.
칼이나 창을 든 사천왕 조각
큰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부터 서암정사의 색다른 경이로움이 눈길을 끈다.
비탈길을 힘겹게 승용차로 오르면 넓은 주차장이 반긴다.
주차장에서 200 m 비탈을 올라 좌측에 <同歸大海一味水>
우측에 <百年江河萬溪流>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기둥
그곳에서 몇 걸음 더 가면 다시 두 개의 돌기둥이 나타난다.
왼쪽 기둥엔 <調御三千界>, 오른쪽 돌기둥엔 <摩詞大法王>
이 돌기둥들이 일주문이며 해탈문이나 불이문에 해당되는 듯.
참배객 가는 길이란 안내판 따라 오른쪽 절벽에 사천왕 조각.
키가 5m도 훨씬 넘는 우람한 사천왕상들이 우측 절벽에 도열.
보통 절의 사천왕은 나란히 둘씩 마주보고 선 형상과 다르다.
이곳 사천왕은 큰 자연바위 위에 나란히 조각.
무지개처럼 생긴 대방광문으로 들어서면 한옥 같은 미타전.
대방광문이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협곡 같은 입구 따라 몇 걸음 걸으면 화엄의 세계로 들어선다.
주변이 온통 큼직한 바위로 이루어진 곳에 보이는 한옥 건물.
여염집 사랑채 같은 그런 한옥건물 벽에 '방하제연'이란 팻말
아직 버리지 못한 세속, 근심, 미련과 시기심을 떨구라는 의미.
미타전 편액이 붙은 한옥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극락전
봉긋한 봉우리 형태의 언덕에 굴법당으로 들어가면 굴극락전
안양문(安養門)을 열고 굴법당으로 들어서면 굴속에 있는 법당.
자연 동굴 바위벽과 천장 사방에 온통 부처님과 불보살 조각
굴법당 극락전은 환희심이 넘칠 정도로 굴 전체가 섬세한 조각
아미타 부처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그리고 8대 보살
10대 제자, 나한, 사천왕 등
용, 연꽃 가릉빈가(迦陵頻伽)
굴법당 벽과 천장바위에도 조각.
빈틈없이 조각으로 메운 바위굴.
20 세기와 21세기 양 세기에 걸친 조각들은 걸작 중의 걸작.
장엄함, 정교함과 섬세함이 석굴암보다 더 빼어난 듯 보인다.
지장보살의 지팡이만 보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섬세한 조각.
지장보살님의 손에 들려있는 구슬은 유난히 검은 색 광채.
그 옥구슬은 다른 돌로 가공한 것이 아닌 동굴의 원석이다.
마천 석재는 옥이라 곱게 갈아주면 옥 특유의 광택이 난다
굴법당이 우리나라에서 서암정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서암정사의 굴법당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서암정사의 모든 불상과 조각품들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벽.
돌을 붙이거나 덧댄 흔적이 없는 암굴.
바위벽 제일 위쪽에 비로자나 부처님,
그리고 아래 세 개의 바위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및 선재동자가 조각되어 있다.
극락전을 나와 산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비로전이 있다.
맞추기 블록을 쌓아 놓은 듯 놓여진 엄청난 규모의 바위들,
그리고 그 바위에 새겨진 제불 보살들의 섬세한 미소와 표정!
산신령이 거느린 호랑이의 콧수염이 살아 움직이는 듯.
독성님 옆 꽃사슴의 숨결소리가 들릴 듯 섬세한 조각들.
서암정사를 만들기 위해 원력을 모은 원웅(元應)스님
10년간 서암정사 바위벽 조각에 몰두한 석공 홍덕희씨.
1991년 33세에 서암에 들어와 44세에 햇볕을 구경한 석공.
현재 서암정사 남쪽 사천방면에서 또 다른 사찰에서 조각 중.
서암정사는 1960년 초 벽송사 주지 원웅스님의 40년 결정체.
화엄도량 서암에서 소중한 성보는 80권의 화엄경 금니사경전
원웅스님이 85년에 시작해 12년만인 1997년에 완성한 경전이다.
스님이 참선 중 감지(紺紙)에 금분으로 옮겨 쓴 화엄경 60만 자
서암정사 돌탑 저 아래로 추성리와 계곡이 한눈에 보인다
서암정사에 깃 든 불심과 신도들의 숨은 정성이 놀라웁다.
법당은 아미타불을 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 보처로는 관세음보살
우 보처는 대세지 보살님을 모셨다 .
서암정사의 지장보살님
대의왕 관세음보살님의 감로수~
용왕전은 대웅전 뒷 편에 ~~
서암정사의 산신각도 바위에 직접 조각으로 모셨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비로전
산신각과 비로전을 들어가는 문도 역시 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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