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88 ( 총각샘. 은방울꽃. 우리나라 성풍습. )

donkyhote 2011. 2. 28. 01:22


총각샘.




노고단 임걸령 총각샘 일대의 구상나무 숲.
물안개 아침이슬에 촉촉히 젖은 구상나무 숲.
고사목이 뒤섞인 구상나무 숲은 참 아름답다.

하늘을 찌를듯 원추형 탑 형태 침엽수림.

1990년대까지 원시림 같던 구상나무 숲.
2000년대부터는 눈에 보이게 줄어들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사는 희귀한 나무.

"저 나무는 이름은 무엇일까?"

.....................구상나무........................
소나무과(―科 Pin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제주도, 노고단 임걸령,
전북 덕유산 등에서만 자생하는 희귀한 수종.

'1988년 서울 올림픽 상징목'으로 선정.

젓나무와 비슷하나 잎이 빽빽하게 달리며
잎끝이 오목하게 갈라진 점이 약간 다르다.
제주도 한라산 해발 1,500m까지 군락 자생지.

잎 뒤에 기공(氣孔)선이 매우 희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나무 전체가 은녹색으로 보이며
매우 아름다워 고급 정원수로 사랑 받고 있다.

'현재, 사라져가는 지리산 구상나무 숲.'

지리산 뿐 아니라 한라산 가야산 덕유산까지
주요 군락지에서 일어나는 자연적 쇠퇴 현상
제 4 빙하기 이후 1만년 동안 생존해 온 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면 지구상에서는 영원히 멸종
인간역사보다 오랜 자연사를 보전할 대책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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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물물교역 등짐 상인들이 오갔다는 화개재를 지나면
토끼봉 화개재에서 남쪽 계곡을 따라 희미한 길이 있다.
일명 칠불사 계곡 또는 연동골은 목통마을로 가는 길목.

이 길은 뱀사골산장 물품을 나르는 길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 뱀사골 쪽으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 산장과 샘터

화개재에서 토끼봉 오르막 길은 점점 더 가파른 된비알.
구상나무, 전나무숲을 지나 진달래능선이 펼쳐지는 정상
4월말 경 토끼봉 정상은 온통 붉게 물든 진달래 꽃 향기.

뒤돌아보면 노고단과 반야봉이 멀리서 뒤따라올 듯
앞으로 명선봉, 세석, 천왕봉으로 이어진 지리 연봉

토끼봉은 반야봉을 기점으로 해서 정동쪽.
즉 24방위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
하여, 토끼봉(卯峯)으로 이름이 붙은 곳이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 초원에 지보초 군락지대.
하여, 야생화 이름을 따서 '지보등'이라 한다.

토끼봉 남쪽 능선따라 20리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듯 솟은 구상나무 숲을 내려서면
온갖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 안부에 이르렀다가 오르막.
쓰러진 고목나무 나뒹구는 평지와 돌밭길 지나 총각샘 이정표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는데
1970년 7월 지리산악회에서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 이용하던 샘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간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

장터목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인 이름이라 해서
노총각 2명이 고심 끝에 총각샘이라 이름 붙였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 단점이 있는데
총각샘 앞에 공터가 있어 야영은 가능한 곳이다.

총각샘을 지나면 경사가 급해 숨찰 만큼 힘든 길
바위 벼랑 사이길로 기어 가듯 오르면 완만한 길.
명선봉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 내리막 흙길.

연하천산장에 이르는 명선봉 능선길은 아름드리 숲.
울창한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숲속의 평지 연하천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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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샘 위치는 토끼봉과 명선봉 사이
즉, 뱀사골 산장과 연하천 산장 중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연하천 산장에 더 가까이 있고 야영장 있는 곳.
임걸령이나 뱀사골에서 식수를 보충했다면 총각샘에 들릴 필요는 없다.
연하천 산장으로 가는 하늘색 계단을 올라섰다면 이미 총각샘을 지나친 것.

<화개재에서 연하천 산장까지는
토끼봉과 총각샘 구간이 된 비탈>

.........총각 샘의 전설............
옛날 지리산에서 약초캐던 총각이
사냥꾼에게 쫓긴 노루를 숨겨주자
노루가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
총각 갈증을 풀어주려 안내한 샘물.

'총각샘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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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샘 찾아가는 길................
총각샘은 찾기 어렵고 지나치기 쉬운 곳에 위치.
화개재에서 토끼봉 오르막 정상 위는 탁트인 조망.

특히 4월 말 피는 진달래 꽃향기가 가득한 곳.
듬직한 반야봉과 노고단이 훤히 바라보이는 곳.
천왕봉, 세석, 명선봉 지리산 연봉이 보이는 곳.

능선 평지 길을 걷다가 돌발길에 총각샘 이정표.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 커다란 벼랑 아래
바위벽에서 총각이 오줌누듯 신기하게 솟는.. 석관수.

천왕봉과 중봉의 경관이 한눈에 보이는 총각샘.
연하천에서 1km 표지판 길 아래 20m 지점에 위치.
토끼봉에서 1시간 도보거리에 큰 얼굴 바위 아래.

가뭄에는 자주 말라 갈증을 해소하기 어렵다.
하여, 이곳 샘물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워도 말고..'

옛날 물물교역 루트인 화개재를 지나면 토끼봉,
화개재에서 남쪽계곡(칠불사, 연동골) 따라 오솔 길.
목통골과 닿는 이 길은 뱀사골 입구 인근의 샘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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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화개재를 지나 이곳을 오가던 등짐 상인들.
등짐 상인이 끊긴 후 심마니 갈증을 달래주던 샘.
심마니 발길이 끊긴 후 구전 속으로 사라졌던 샘물.

지리산악회 노총각들이 다시 찾아낸 총각샘.
이젠 여성 등산객에게 인기있는 샘물이 되었다.
이곳에서 갈증을 달래면, 절로 힘이 솟는다고 한다.

총각샘의 원 주인은 목통골 인근의 야생동물들.
총각샘은 사람들이 모르는 수많은 전설의 고향.
목통골의 야생동물들에게 목통을 적셔주는 샘물.

이곳 샘물 지형은 마치 남성같아., 총각샘.

남성의 체모인듯 총각샘을 애워싼 구상나무 숲.
남성 근육과 같이 울퉁불퉁 험악한.. 바위 지형.
총각 냄새가 느껴지는., 낙엽 썩는 퀴퀴한 숲 냄새 .

커다란 벼랑 허리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남성의 심벌.
그것을 보이기 부끄러운 듯, 벼랑 아래 숨은 총각의 형상.
여성에 비유한 지리산의 샘물들 형태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대부분의 옹달샘은 여성에 비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총각샘은 남성에 비유한 이름이 이색적.
주위 산세와 걸맞긴 하지만, 어쩐지 낯이 뜨거운 이름이다.


1970년 무렵 유행가요 - 초원

안녕하며 떠난 그님이~
초원에서 만난 그님이~
지금은 어느 하늘 밑에서 ~
초원을 노래하나~~.

뜨거운 그 입술.
흐느끼던 그 숨결.

안녕이라고~ 안녕이라고~
저 푸른 초원에 못다한 사연이
마지막 잎새 되어 흐느낍니다.



 


은방울꽃.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은방울꽃(화냥년 속고쟁이 가랑이꽃)
커다란 두 풀잎 사이로 솟아오른 꽃대.
늦은 봄 은방울이 달린듯 피어나는 흰꽃

 

옛 여인들 속옷 고쟁이를 닮은 커다란 두 풀잎
그 아름다움을 시샘하여 붙여진, 화냥년 접두사.
고쟁이로 몸단장하는 여인은 거의 웃음 파는 기녀.

고쟁이 열 두벌 입어도 보일 것 다 보인다는 옛말.
속옷을 많이 입다보니 밑이 터진 여인의 속 고쟁이
앉으면 벌어지게 되어 그 안이 들여다 보이던, 속옷

백합과 은방울꽃은 은은한 향기가 일품
옛부터 여인이 은밀하게 몸단장하던 향수.
남성의 성욕을 자극한다는 은방울꽃의 향기.

성관계 후 정자가 난자를 찾아갈때,
난자가 방출하는 물질에서 나는 향기.
정자는 난자의 향기를 향해 달려간다.

즉, 후각 수용체가 감지하는 냄새가 은방울꽃 향기
은방울꽃 향기에 둔감한 남성은 불임 가능성이 높다.
밤꽃이 정자(정액) 향기라면, 은방울꽃은 난자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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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쟁이는 한복 여인네들의 옛 속옷 가운데 하나.
이조시대 평민 여성옷은 저고리 적삼 치마 단속곳
바지 속속곳 다리 속곳 차림에 버선과 짚신을 신었다.

치마 밑에 다리속곳 속속곳 바지 단속곳 차례로 입었다.
다리속곳은 흰 목면으로 만들어 허리띠를 달아 맨 속옷.
고쟁이는 속속곳 위 단속곳 밑에 입는 남자바지 모양 옷

주로 여름에 입으며 밑이 터지고 가랑이 통이 넓었다.
옷감은 무명 베 모시 등을 사용해 홑으로 박아 만든다.

오른편에 아귀를 내고 허리에 달린 앞끈을 뒤로 돌려
앞으로 오게 하고, 뒤끈은 앞으로 가져다 서로 잡아맨다.
지금은 수의로 쓰이는 고쟁이는 고구려시대부터의 여성 속옷.

고구려 벽화 속에서 여성의 겉옷과 속옷.,고쟁이.

신라 흥덕왕 때 진골 여성은 계수라를 금하고
평민 여성은 시(施)를 사용하도록 옷감을 제한.

고려시대 여성은 관고(寬袴)와 저상을 입었는데,
저상은 이조시대에 이르러 여자 고쟁이(단속곳),
관고는 이조시대 초기 치마 모양의 바지가 되었다.

이러한 속옷 풍습은 20세기에 보다 단순화되어
다리속곳과 속속곳은 팬티 또는 블루머로 변모,
여자 바지는 속바지, 단속곳과 무지기는 속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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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천둥 벌거숭이였던 60만년전 아프리카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는 다윈의 진화론.
사람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닌 그 중간단계 유인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자바=북경=네안데르탈=크로마뇽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기원.
인류가 제 4 빙하기 추위를 극복한 힘은 옷.
옷을 입기 시작한 인류가 오늘날 인류의 기원.

메소포타미아 인류의 기원은 송화강 유역.
인류는 직립 보행을 하면서부터 도구를 사용.
불, 언어를 사용하고 옷을 입으면서부터 기원.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어떤 옷을 입었을까?'

한반도 신석기시대 유물인 바늘이나 실을 잦던 도구들
청동기시대 농경문화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 차림에 상투
총각은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기혼남자와는 다른 점.

'한반도 총각의 산발머리는 훗날 댕기머리.'

삼국시대에는 두로마기 중심으로 저고리, 바지, 치마.
모자, 허리띠, 신발, 장신구를 사용한 고유의 옷차림.
아한대성 삼한사온 조건과 북방 유목민 문화요소 결합.

'속옷부터 겉옷까지 몸을 감싸는 활동복.'

여자 한복은 짧은 저고리와 긴치마,
남자 한복은 저고리와 통 넓은 바지.
한복은 우리나라 전통을 대변하는 옷.

한복 역사는 고구려 무덤 속 벽화를 보면 삼국시대.
당나라 의상과 불교 영향을 받은 것이 최초의 한복.
전통 옷은 각국 민족의 문화 풍습 역사를 대변한다.

한복은 저고리 길이, 소매통, 치마 폭이 약간씩 변화.
신분을 알리는 실크, 면, 모시 & 고름과 소매통 색상.
한반도 반만년 옷차림 역사상 변화가 적었던 것은 상복.

..............한반도 전통직물 삼베의 특성..................
우리나라 전통의복 중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은 삼베 옷.
보통 마 직물은 대마(삼베, Hemp ), 아마(亞麻, Linen)
저마(모시, Ramie ), 황마(Jute )등으로 구분을 한다.

그중 삼베는 삼과 식물이며 온대 열대지방에서 3-6m까지 성장.
직물로 쓰는 그 껍질 안쪽 인피섬유 중에서도 긴 것 만을 사용.
삼베직물 섬유는 보통 긴 것이 10센티, 대부분은 3-4센티 정도.

'삼베는 자연섬유 중에서 섬유질이 가장 긴 섬유.'

삼베사(絲)는 면사(絲)보다 섬유강도가 10 배
로프, 그물 또는 하절기 모기장 용도로도 사용.

삼베는 고조선 시대부터 일반적인 마포로 도입되기 시작
통일 신라시대 저마포(모시)와 대마포(삼베)로 분리 직조
저마포(모시포)는 왕족이나 귀족용 옷, 대마포는 서민용 옷.

'삼베 수의는 누가 처음 사용했을까?'

935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나라잃은 설움 탓에 삼베 옷을 입고 개골산에 입산.
삼베 옷은 신라가 망하기 전까지만해도 백성들의 옷.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
신라 백성이 애도의 뜻으로 입은 상복.
그후 삼베옷은 망자에 대한 애도의 뜻.

4년에 한번인 윤년 윤달에는
부모님 수의를 준비하는 풍습.

윤달은 공(空)달이라 무엇을 하든
아무 탈이 없는 달이란 믿음이 있다.

윤년 윤달에 부모님의 수의를 준비하면
부모님 장수 및 자손이 번창한다는 믿음

'옛 조상들은 왜 삼베 수의만 고집했을까?'

삼베의 향균기능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듯 추정된다.
즉, 삼베 수의는 뼈가 썩지 않고 건조되게 만드는 효과.
서양의 미이라 또는 우리의 전통 식생활에서도 발견된다.

즉, 삼베 행주, 생선을 건조할 때 쓰는 삼베포,
된장 고추장 항아리 독 뚜껑 밑에 덮는 삼베포.

삼베 줄기와 잎에 테트라히드로카나비눌(THC) 라는 마취성 물질
환각작용을 일으키므로 1976년 대마 관리법으로 재배 취급을 규제
현재 일부 특산지역을 제외하고는 재배 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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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
금강산 아닌 설악산을 근거지로 왕건에 대항.
마의태자 후손이 만주 여진에 세웠다는 금나라.

금나라는 후금에서 청나라로 이어져 중국 통일.
임진왜란후 병자호란을 일으켜 이조를 점령한다.
청나라는 신라 재건을 위해 세웠다는 학설도 있다.

한반도에서 전통적인 한복이 양복에 밀린 것은 불과 반세기 정도.
특히 여성 옷차림에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준 것은 1960년대 말 경.
미니스커트 붐으로 한반도의 전통 사상과 풍습 성윤리에 일대 혁명.

우리나라 옷차림 혁명을 일으킨 미니스커트.

전통 한복은 치마 속에 겹겹이 속옷
그것도 모자라 버선으로 겹겹 가린 발.

1970년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유행 붐.
그로 인해 여성의 속옷 패션도 달라진다.

원래 속옷은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기 위한 수단.
아담과 이브가 몸을 일부를 가린 나뭇잎이 속옷의 기원.

고대 이집트에서 직물로 만든 '로잉스'
현대적인 속옷의 최초 모델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인은 알몸을 악덕이라 여겨
'츄니카' 속옷과 '토가' 상의를 걸쳤다.
'로잉스'는 오늘날 팬티, 슬립의 기원이다.

16세기 프랑스 팬티의 기원이 된 '드로어즈'
승마용 바지로서 밑이 막힌 팬티가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 승마복이 필요한 때문.

여성 속옷은 코르셋 종류가 개발되었고,
치마 모양을 부풀리기 위해 '후프'도 개발.

뻣뻣한 천으로 만든 페티코트
주로 겉옷의 맵시를 위해 입었고,
19세기 가슴을 강조한 브레지어 탄생.
20세기 흰색에서 다양한 색상 무늬 속옷.

그리스 로마 시대 유방을 고정하는 띠 아포대즘(apodesm)
긴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속옷이 오늘날 브래지어의 시작.
그리스와 로마시대엔 풍만한 유방과 관능미가 강조된 속옷.

르네상스 시대 기독교적 금욕주의로 성애를 죄악시.
비잔틴 시대부터는 여성이 가슴을 옷속에 감추었다.
12세기 코르셋 초기 형태의 '스테이지'가 등장한다.

 


기독교 관념에서 벗어나 관능미 강조.
13세기 중엽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브래지어로 가슴을 치켜올려 여성미 강조.

르네상스 시대 몸의 에로틱한 자극을 강조.
여성복은 엉덩이를 강조하거나 가슴을 과장.

 


..................................브래지어의 기원....................................
이 시기에는 가슴만을 돋보이게 하는 브래지어가 탄생하지 않았다.
코르셋의 원조 격인 바스뀐느(basqune)와 꼬르삐께(corps-pique)
허리와 배를 조이고 등을 판판하게 하여 가슴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속옷.

1791년에는 초기의 브래지어라고 할 수 있는 볼스터(bolster)가 등장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나(zona)처럼 띠 형태는 19세기에 긴 코르셋로 발전.
이렇게 몸을 교정하는 옷에 대한 연구 속에서 브래지어의 모체 볼스터 탄생.

볼스터가 개량되어 1840년대에 바스트 임프로버(bust improver)가 탄생
철사나 셀룰로이드가 들어간 컵 모양의 코르셋이 1916년에 어깨 끈이 개발.
1921년 미국에서 처음 코르셋 스타일의 콤비네이션 브래지어가 고안되었다.

1932년부터 그 길이가 점차 짧아지기 시작.
1937년 현재와 같은 브래지어가 사용되었다.
1935년 워너는 브래지어를 사이즈 별로 제작.

'A (작은 사이즈)에서 D (큰 사이즈)까지 구분.'

2차 세계대전후 면, 고무제품, 실크, 철 소재 제품.
임산부 용, 어깨 끈이 없는 브래지어 등등도 개발.
합성 섬유 스판텍스, 라이크라, 형상 합금 신소재
다양한 소재로 인해 오늘날 브래지어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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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는 1, 2 세계대전 후 차츰 실용적으로 간소화.
미니 스커트가 출현하자 멋 위주의 팬티가 유행한다.
여성의 간소화된 팬티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을 강조.

남자 팬티의 앞 여밈은 일본 주부가 처음 개발.
그후 기능과 아름다움이 개발된 수많은 속옷들.

일본의 전통복 기모노는 속옷을 받쳐입지 않는다.
즉, 고대사회 일본 여성들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
기모노는 겉옷과 속옷의 역활을 겸한 전통복인 셈.

여성의 기모노는 혼자 힘으로 입을 수 없는 옷.
남성 또는 누구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옷이다.
하여, 여성의 기모노에 손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기모노는 정절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예복.

하여, 몸을 허락하는 경우에도 기모노는 벗지 않는다.
기모노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면 마음을 바치겠다는 뜻.
기모노는 몸은 허락해도 마음은 지키겠다는 뜻의 예복.

'기모노는 일본에서 전통 의식에서만 입는 예복.'

기모노는 초대 손님에게 최고의 경의를 갖추는 예복.
기모노는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을 일으킨 원동력.
달러가 귀한 시절 그 옷을 입고 몸을 허락한 일본 기생.

'기모노는 기생의 옷이 아닌 귀족 여성의 예복.'

기모노는 백제 귀족의 옷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라에게 패망후 상복을 벗지않았다는 백제 귀족.
우리나라 상복은 패망 백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
나라를 찾을 때까지 고집한 상복.
그 옷이 일본 예복인 기모노로 발전.

..............................기모노의 유래....................................
일본의 전통복 기모노는 나라 시대(奈良時代:645~724) 초기
중국 파오(袍) 양식의 옷에서 유래된 남녀가 즐겨입는 전통복.
기모노의 기본형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소매는 길고 넓다.

목부분이 V자로 패여 있고
허리에 오비(帶)를 묶는다.

원래 일본옷은 아니었지만 17~18세기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
기모노는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옷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기모노가 널리 알려진 계기는 일본의 2차대전에서 패망 직후.

여성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옷.
기모노를 활짝 들어올린 자태는 마치 꽃 한송이.

활짝 핀 한송이의 꽃처럼,
벌 나비가 꽃위에서 춤추듯
온몸으로 사랑을 갈구하는듯.

그 신비로운 자태에 매료된 이방인들.
일본이 2차대전 패전후 일어난 원동력.
아직도 기모노는 신비로운 매력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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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 시대 복식제도
'표의와 내의'란 조항이 있다.

삼국시대 벽화를 보면,
상의 속에는 속저고리
바지 속에 입는 속바지.

삼국시대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속옷.
이후 기능이 개선된 여성 생리대, T자형 띠.
T자형 띠는 세탁이 가능했던 생리대 겸 속옷.

이조의 여인들은 겹겹이 속옷을 입었다.
저고리 밑에는 속적삼과 속저고리 착용.

겉치마 속치마 속에 다리속곳 속속곳 단속곳 등 6~7 가지.
속옷은 정절의 소중함과 아울러 비밀스러움의 상징이었다.

다리 속곳은 오늘날 팬티에 해당.
천으로 아래를 둘러 끈으로 고정.

속속곳은 밑이 막힌 형태,
바지속곳은 고쟁이(속바지)

그 위에 너른바지, 속치마 순서
여름에는 특히 속옷을 중시했다.

한복은 속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맵시가 달라진다.
어떤 속옷을 입느냐에 따라 그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의 한복 속옷은 실용성보다 에로틱한 발상에 중점.

하여, 이조시대 멋장이라 일컫던 기생들.
속옷이 살짝 보이는 자태로 사대부를 유혹.
벗기고 벗겨내도 끝없이 겹겹인 속옷이 유행.

'얼마나 사대부 양반들 애간장을 태웠을까?'

한강 광나루에 표모탄(漂母灘)이라 불리우던 개울이 있었다.
10 년 수도 끝에 하늘로 오르던 신선이 떨어져 죽었다는 개울.
그곳에서 빨래하던 여인 '표모'의 치마 속을 우연히 엿 본 신선.

하늘로 오르려는 순간 넋을 잃고 개울속으로 곤두박질.
표모는 신선도 떨어지게 할만큼 매혹적인 자태였던 듯.
이조시대 여인의 각선미는 그만큼 보기 어려웠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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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 은방울이 달린듯 피어난 흰꽃
커다란 두 풀잎 사이로 솟아오른., 꽃대

 

옛 여인들 속옷 고쟁이를 닮은 커다란 두 풀잎 
열 두벌을 입어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는 고쟁이 
앉으면 벌어지게 되어 그 안이 들여다 보이던, 속옷

 

은방울꽃 = 화냥년 속고쟁이 가랑이꽃.

 

 


우리나라 성풍습. 



1. 문명 이전 원시 농경사회

대체로 남녀 관계가 평등하고 협동적이었으며
남녀 모두 성적으로 규제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고 남녀평등 시대였다 .

농업사회에 들어서고 가부장제도가 출현하면서
우리나라 성문화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되었는데
부가 창출되면서 상속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이를 위해 혈통의 정통성을 따지며 남녀 성적 불평등

여성들의 성행위는 남편을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통제
여성의 정절이 규범화 되며 남성이 사회적 권력을 장악.
남성은 여성보다 성규범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2. 삼국시대

고전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자유로웠던 성풍습.
남녀가 솔직했고 성에 대해 긍정적이 너그러웠던듯.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 - “그 나라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즐기며, 나라 안 읍락에서 남녀가 밤늦도록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논다”

(주서 49권 열전 41) -“남녀가 함께
시냇가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신라 원성왕 시절 2월 초파일부터 보름날까지
남녀가 홍륜사 탑을 도는 복회(복을 비는 모임)
'김현'이란 청년이 한 처녀와 정을 통한 이야기.

김현이 탑을 돌고 있을 때,
한 처녀가 그를 따라 돌다가
눈을 주고 받아 돌기를 마치자
구석진 곳으로 가서 정을 통했다.

탑돌이 풍습 택신제에서는 야밤에 알몸 부부가
집 둘레를 짐승처럼 기어 다니며 세 바퀴 돈다

이와 같은 풍습은 택신에게 주술적으로
성적 만족을 시켜주지 않으면 해를 당한다
라고 여겼던 재래의 성 신앙과 복합된 성풍습.


3 고려 시대

남녀가 자유로운 연애를 했으며,
장인, 장모, 딸, 사위가 포함된
여성 중심이 이상적인 가족 형태

이때부터 "장가 간다"는 말이 유래.

고려인들이 남녀가 경솔하게 결합되고
부부가 쉽게 갈라선다 - (고려도경 19권)

여름이면 시냇물에 들어가서 남녀구별 없이
옷을 벗고 함께 목욕하였다 - (고려도경 23권)
그리고, 왕도 과부를 왕비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남편이 먼저 죽은 후 재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자유결혼이 점차 부모의 의사에 따라
맺어지는 중매 결혼으로 바뀌었다 - (고려도경 23(?)권)

오늘날 우리나라 관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교 영향
유교가 정착되기 이전까지는 여성의 성은 개방적인 편.


4. 이조 시대

유교사상 도입으로 삼강오륜, 삼종 지도 등으로
가정에서의 남성의 권한과 위엄은 절대적인 존재.
남아 선호사상으로 여성이 남성에 철저하게 종속.

그러나, 남성중심 굴레를 깨려는 여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여인들이 장록수, 어우동, 유감동, 장희빈.
이조시대 왕에게 총애를 받았던 여자로 알려진 인물들.

...................이조시대 왕의 여인들.............................
연산군 때 장녹수(張綠水), 그 직전 성종 때 어우동<於于同>)
세종 때 감동(甘同), 숙종 때 장희빈이 이조 요부의 선두주자.
이조의 27 왕 중 연산군, 광해군을 뺀 25명의 평균수명은 46세

기름진 음식에 비해 적은 운동량,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왕들

이조 역대 왕들은 비만,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에 시달렸다.
특히, 왕실 혈통의 번영을 위한 후궁과 궁녀 및 궁궐기생 제도.
왕의 과도한 성생활은 단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 요인.

"20세까지 하루 2회,
30세까지 하루 1회,
40세까지 3일 1회."

내시들이 왕의 성행위를 제한하는 옥방비결을 외우고 다녔다.
왕은 양기를 돋우는 음식으로 참새를 넣어 쑨 찹쌀죽을 즐겼다.
이조시대에 왕 또는 왕실을 사로잡았던 여인들 기록을 살펴보자.

- 연산군 일기 8년(1502) 11월 25일 장녹수에 관한 기록 -

"장녹수는 집이 가난해 몸을 팔아 생활했으므로 여러번 시집.
그러다가, 제안대군(齊安大君)의 남자 노비 아내가 되었다 한다.
아들 낳은 후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가 되었는데 노래가 빼어났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노래소리가 맑아 들을만 했고,
서른이 되어도 얼굴은 16세 아이와도 같이 어려 보였다.

왕(연산군)이 그 소문을 듣고 기뻐하며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총애가 날로 두터워져 녹수가 말하는 것을 왕은 모두 들어주고
숙원(淑媛. 종3품)에 봉했다. 얼굴이 특별히 예쁘지 않았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데가 없었다"


- 세종 9년 8월17일 실록의 감동에 관한 기록 -

"아버지는 유귀수(兪龜壽),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당시 감동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감동이 병을 핑계로 상경 방종하자 최중기가 버렸다."

여기서 방종이란 유감동의 성적 방황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이승(李升), 황치신(黃致身), 전수생(田穗生), 김여달(金如達)
·이돈(李敦) 등 6명 남자 외 간통자는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 종결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실록 자료를 정리하여 간통자의 이름을 모아보면, 거의 40 여명.
고관대작에서부터 수공업 기술자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애정행각.

이효량은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했다.
정효문은 숙부 정탁(鄭擢)이 감동과 간통한 사실을 알면서도 관계

정효문은 정탁과 감동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사헌부의 조율(요즘의 판결문)은 정효문의 변명을 일축했다.

당시 남자 40명과 간통한 유감동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남편을 배반하고 도주하여 개가한 벌'에 해당하는 판결.
남편과 잠을 자다가 소변을 핑계로 달아나 김여달과 간통
감동의 형량은 곤장 110대, 간통한 남성 20명은 가벼운 벌.

간통한 여인은 수치심을 주기 위해 옷을 모두 벗기고 곤장 100대
그러나, 감동은 유부녀 신분이기에 곤장 10대를 추가로 더 때렸다.
그리고, 감동의 양반 신분을 박탈하고, 천민인 지방 관기로 내쳤다.

'원래, 감동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세종대왕이 감형.'

이조시대 사대부의 이혼은 왕이 개입할 정도의 중대사.
불가피한 상황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조시대.
그러나, 세종대왕 시대에 유독 이혼과 간통사건이 많았다.

하여, 세종대왕은 관기 존폐를 조정에서 거론.
당시 좌의정 허조는 기생제도 타당성을 아뢴다.

"남녀간 색욕이란 인간의 본능이므로
그것을 무리하게 억압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만약 각 고을의 기생을 모두 없앤다면
지방에 나간 젊은 관리들이 여염집 부녀자들을
불의로 취해 많은 죄악을 범하게 될 겁입니다.

그러므로 국가 인재들이 죄짓지 않게 하려면
기생제도는 있어야 한다고 보나이다." -허조.

허조는 평소 검소하게 옷을 입고 근검절약
밥은 허기를 채우는 소량 식사 정도에 그치고
술과 여자를 멀리하고 공과 사가 분명한 청백리

허조가 관기제도의 타당성을 간언하는 것은
본인은 절제하지만 관기제도가 없어질 경우
국가에 미치는 백년대계를 생각했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성군이지만 성생활은 문란.
성병으로 인해 운명할만큼 사생활 복잡.
그러나, 향음주례 주도의 진수를 가르친 왕.

..........향음주례 주도........
술잔이 이르는 데마다 절하고,
잔이나 손을 씻을 때마다 절하고,
술잔을 받을 때나 줄 때마다 절한다.

술자리가 끝날 때마다 절하여
지극한 정성을 예절로 표한다.

사람이 모여 앉는 데는 위아래가 있는바,
자리가 남향과 동향일 때 오른쪽이 상석,
북향과 서향일 때는 술자리 북쪽이 상석.

주인과 손님이 절을 나눌 때에는
상호 벼슬이나 학식에 관계 없이
공경하는 사람이 먼저 절을 하고,
서로 존경할 때에는 같이 절한다.

술과 음식을 반제(飯祭)하는 것은
천지신명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현주(물)을 청주와 같이 준비하는 것은
상호 서로의 근본을 귀중하게 여김이다.

술잔 하나로 모든 사람이 술을 마시기.
술자리의 화합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술을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남에게 권하기.
술을 함께 즐겁게 취하게 하려 하는 의도.
자기는 마시지 않고 남에게만 권하면 벌주.

술자리에서는 어른이 일어나 나가면
모두 따라서 돌아가는 것이 예법인바,
지루하고 난잡함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말할 때 가진 물건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말하는 것은 공경함이다.

이밖에도 전통주도에 삼가할 일을 두고 있다.
예의와 품위와 건강을 잃을 것을 경계하는 주도.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목적을 둔 향음 주례.
........................................................

세종대왕은 자유분방함을 즐기면서도 예의를 존중
유감동을 일벌백계로 다스리면서도 감형을 했던 듯.
당시 유교관으로서는 성군의 진면목을 보였던 명판결.

유감동은 명문가문의 철저한 정절 교육을 받았지만
첩 또는 창기로 행세하며 문란한 성생활을 일삼는다.

'유감동은 스스로 신분을 속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대부 마님 신분이 밝혀지면 감동 자신에게 더 큰 피해
그녀와 관계한 남자들에게도 큰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간통죄는 요즘과 판단기준이 달랐던 것 같다.
사대부 양반 신분도 뭇 남성들 앞에서 옷벗기고 매질.
형틀에 묶인 채 곤장 25대면 엄지 발가락이 빠질 지경.

죽음 같은 수치심 끝에 몸부림 없이 견딜 수 없는 고통.
안방 마님에서 하룻밤에 천민 신분인 지방 관기로 전락.
이조시대 간통죄는 여성에게만 유독 지나치게 가혹했다.

'이조 성종 때 어우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
그녀는 사대부 양반들이 성의 노예가 되길 자청할 만큼 미모.
어우동은 근친상간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뭇 남성들과 관계.

'남성의 은밀한 곳까지 그녀의 이름을 문신.'

그녀의 은밀한 곳에 문신을 새겼던 남편 태강수.
유교 관념과 남성우월 사상에 대한 그녀의 저항.
중죄인도 꺼리는 문신을 사대부 남성들에게 강요.

욕정에 빠진 사대부를 성의 노예로 굴복시킨 그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등을 내민 양반들도 부지기 수.
자유부인 어우동은 남성우월 유교관념에 반발한 여성.

'그녀의 이름을 등판과 팔뚝에 문신한 사대부 양반들.'

결국, 문신은 그녀와의 간통죄 증거물이 되어 신세를 망친다.
어우동은 도승지 김계창의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 끝에 사망.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역사에 남는 이조시대 자유부인이다.


-세조실록 12년(1466) 3월 13일 기록 -

"노래를 잘 부르는 자를 모아 장막(帳幕)에서 노래하도록 했다.
강원도 양양(襄陽)의 관노 동구(同仇里)가 노래를 가장 잘 했다.
"아침 저녁을 먹이고 악공으로 대우해 왕의 행차를 따르게 했다."

이조 시대에 신하들이 왕의 성생활까지 관여한 용례(用禮)제도.
한글을 창제한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이 그 체계를 최초로 제도화.
왕이 왕비와 후궁들의 처소에 들어야 하는 날자를 지정했던 제도.

왕이 후사가 없을 경우 무수리와 잠자리를 지정한 사례도 있었다.
훗날, 이 제도는 후사가 없는 국모를 칠거지악 죄인으로 만든 악법.
연산군 이후 왕권정치가 무너지고 대신정치가 일어나자 더욱 극성.

왕은 권세를 장악한 대신들 권세를 지켜주는 왕실의 종마 같은 신세.
따라서, 대신들이 권하는 용례(用禮) 체계를 무시한 왕은 말로가 비참.
왕권정치를 확립하려 애썼던 연산군이 대신정치에 무너진 대표적 사례.

'숙종때 집권파 서인들은 왕에게 중전 민씨 처소로 들라 강권.'

숙종은 서인 세력에 반발해 장희빈의 처소에 들기도 했다는 역사 기록.
중종 반정때 대신들 강권에 의해 부인과 이혼 후에야 왕위에 오른 중종
이조 역사상 대신들의 파벌 권력이 왕권을 넘어선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이조시대 왕이 자기 마음대로
사랑을 나눌 대상은 누구였을까?'

인의 장막 속에서 왕에게 궁궐기생과의 사랑은 스트레스 돌파구.
왕이 후궁이나 궁녀에게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성생활.
팔도에서 뽑혀온 궁궐 기생은 왕에게 8도의 민심 및 풍습까지 전달.

후궁이나 궁녀가 아닌 신분으로 궁궐을 출입했던 왕의 여자들.
왕은 그녀들을 통해 궁궐 밖 세상물정 및 민심도 파악했던 듯.
하여, 궁궐기생 소춘풍과 사랑에 빠져 궐밖 잠행이 잦았던 성종.

소춘풍이 궁궐에서 성종의 프로포즈를 거절했기 때문.
왕의 여자가 되면 궁궐에 갇혀 살아야 하는 궁궐 법도.
왕의 후궁이 되기보다 자유로운 기생의 길을 택한 소춘풍.

결국, 애간장이 탄 성종은 잠행으로 그녀를 찾아간다.
아무도 모르게 찾아간 성종은 다시 그녀에게 프로포즈.
그녀 뜰에서 '고려가요 만전춘별가를 연상케 할만한 정사.

일개 기생 신분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정사.
그녀는 자유로운 한마리 야생마가 되어 입었던 왕의 성은.
성종은 하루밤이 멀다하고 잠행을 나와 소춘풍을 찾아간다.

'자유분방한 애욕의 즐거움이 컸던걸까?'

성종은 38세를 일기로 젊은 나이에 운명한다.
그러나, 소춘풍과의 사랑은 구전으로 전해온다.
소춘풍은 성종이 죽고나자 궁궐에서 멀리 떠난다.

함흥 명기로 인생을 달관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그녀.
함경도 두메산골 박색과부와 노승의 하룻밤 사랑에서 출생.
5 살에 쌍룡사에서 불경을 배워, 열 살에 무불통달의 경지

그 절에 불공왔던 어느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영흥기생
천하의 한량들과 풍류의 벗이 되어 이름을 떨쳤던 소춘풍.
궁궐 연회에 성종의 부름을 받아 고관대작들만 상대한 기생.

'문무백관을 한시로 제압한 소춘풍의 재치 넘치는 일화.'

그로부터 인연이 되어 성종과 사랑을 나누었던 소춘풍.
소춘풍이 가슴을 열고 정을 준 사람은 사인 이수봉 뿐.
그가 죽어 헤어진 뒤에 중년에는 최국광의 첩실이 된다.

최광국에게 이수봉이 보고싶다고 유언을 할 만큼 사랑.
소춘풍의 고백 앞에 입을 다물고 먼 산을 바라본 최국광
가슴을 휩쓸고 지나가는 삭풍처럼 쓸쓸하고 차디 찬 북풍.

바람이여…
서글픔이여….
아, 외로움이여_.

소춘풍이 죽은 뒤 최국광은 선영 아래 그녀를 묻었으며,
종실 흥원군이 소춘풍을 사랑하여 일찍 언약한 바를 지켜
영전에 제수를 차려놓고 사별을 아쉬워 제사지냈다고 한다.

성종이 경복궁 경회루에서 벌인 대보름 잔치에 초대 받은 신하.
구름이 달을 가린 틈을 타 기생과 사랑을 벌였다는 실록의 기록.
이조시대 역대 왕은 성병 위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연산군 당시 경회루 아래 붉은 장막 안 흥청망청 주지육림.
궁궐기생은 관비에 불과하지만 사대부 대신들과 대등한 관계.
황진이는 박연폭포, 서경덕, 자신을 송도삼절이라 자칭할 정도.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권력을 좌지우지한 상궁도 있었다.
선조와 광해군 부자지간 사랑을 동시에 받은 상궁 개똥이.
왕의 여자로서 권력의 핵심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인물.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후 유배지 제주도에서 운명.
이조15대 왕(1608~1623)으로 재직, 1575년 출생 1641년 운명.
왕권을 세우려다 오히려 대신 세력에 밀려 당파싸움에 희생양.

선조의 둘째 아들로 적자 영창대군과 왕권다툼에서 승리.
임진왜란 당시 세자 신분으로 전쟁터 일선에서 혁혁한 공.
왕으로 재직할 때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정책.

'폐위된 왕의 여자들 신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모두 폐서인(서민)이 되어 뿔뿔히 흩어져 유배 생활
시집간 딸을 제외하고는 외부와 단절된채 철저한 감시생활
기존에 누리던 영화가 하루 아침에 몰락해 자살하기도 했다.

생산하지 못한 후궁이나 궁녀는 경계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일단, 한양의 사대문 밖으로 축출 하되, 철저한 감시의 대상.
왕비일 경우 그 가문 일가까지 화가 미쳐 척살당하기도 했다.

재산은 모두 압수 당했기에 생활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생활.
행여,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체포해서 엄벌에 처했다 한다.
하여, 자결하든가, 굶어죽든가, 삯바느질로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일감을 찾는 것조차 그리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정순왕후도 동대문 밖으로 추방.
백성들이 여인전용 채소시장을 만들어 정순왕후를 도왔다.

'당시 목숨 건 도움의 손길은 끊이질 않았다는 동대문 시장.'

왕이 폐위되는 일은 드물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이 폐위되었다.
왕이 폐위되면 그 가족들은 유배생활의 고통을 참지 못해 사망.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는 강화도에 유배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 동문, 폐사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안치.

그런데, 유배 생활 중,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자살을 하여 죽게되고,
폐비 유씨는 홧병으로 죽었지만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18년 유배생활.
초연하고 꿋꿋한 생활로 버틴 후 어머니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언.

하여,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묘 아래쪽
그 오른편에 묻히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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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능소화는 '왕의 여자'를 상징하는 구중궁궐의 꽃.
이조시대에는 사대부 후원에만 심을 수 있었던 '양반꽃.'
상민 뜰에 이 꽃을 심어져 있으면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능소화꽃은 왕을 사모하다가 죽어간 궁녀의 상징.
지아비 한 명 외에는 섬기지 말라는 뜻이 담긴 꽃.

옛날 옛날에 복숭아빛 뺨에 자태 어여쁜 궁녀 소희
왕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랑 후 빈의 자리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후 왕은 한번도 빈의 처소를 찾아 오지 않았다.

왕이 찾지 않는 빈이라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기거.
소희는 구중궁궐의 외로움 속에 오직 왕만을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오늘은 오시려나? 내일은 오시려나?

'혹시나 처소에 가까이 왔다가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며 담장 너머 바라본 기나 긴 세월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쳐 상사병으로 죽으며 남긴 유언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

마지막 소원대로 구중궁궐 그 담장가에 묻힌 소희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들 때
높은 담장 밖을 보려고 발돋움하듯 핀 꽃이 능소화.

능소화는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을 피우며
그 나무의 진액을 빨아 먹어 죽게 만들기도 한다.
능소화는 한번 달라붙으면 죽도록 안떨어지는 고리.

하여, 여색에 눈이 머는 것을 경계하는 뜻의 양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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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궁궐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도 성행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765년 8월, 8살에 즉위된 혜공왕.
여자 놀이를 즐겼다가 780년 4월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어릴 때부터 궁궐 여인들 틈에서 성장한 탓..'

785년 미소년 묘정은 신라 관리 및 당 황제에게 사랑을 받고
고려 공민왕은 부인 노국 공주가 죽은 후 미소년들과 동성애.

신라 화랑은 꽃미남이란 뜻이고 그 화랑의 우두머리가 풍월주.
남사당은 화랑 집단의 동성애 성풍속 문란을 풍자하는 놀이단체.

이조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 둘째 며느리 봉씨가 시녀와 동성애.
세종대왕은 궁녀들의 동성애는 곤장 100 대의 형벌로서 다스렸다.
이조시대 한글을 창제한 성군 세종대왕은 몹쓸 성병으로 운명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나라 각 왕조의 궁궐 윤리관을 짐작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궁녀와 내시에 애워싸여 살아가는 임금.
임금 이외에 바라볼 남자가 없는 궁궐의 많은 여인들.
일반 백성들의 성 윤리관과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술과 여자가 넘치는 곳에 성병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 또는 대신들과 풍류를 즐긴듯.
세종대왕이 육례(六禮)중 음주에 관한 예를 가르친 정통주도.

첫째,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 것,
둘째, 음식을 정결하게 요리하고 그릇을 깨끗이 닦고 관리할 것,
셋째, 품위 있게 걷거나 행동하고, 조용히 말하고 절도있게 언행.
넷째, 존경하거나, 사양하거나, 감사할 때마다 절하거나 말을 할 것.

'세종대왕의 성병은 궁궐기생들과의 잦은 향연 탓일까?'

세종대왕은 정통주도를 가르칠 만큼 주색과 풍류를 즐긴 듯.
또한 백성들의 고충을 깊이 헤아렸던 성군으로도 추앙받는 왕.
하여, 훗날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 궁궐기생들은 정기 건강검진.

오늘날까지 화류계 여성은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게 되어있다.
기생이 법적으로 정기 건강검진을 처음 받게 된 시기는 일제시대.
허준이 어의로 있던 임진왜란 당시는 우리나라 전역에 성병이 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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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병(花柳病)은 매독, 연성하감, 임질, 제 4 성병 등.
매독은 옛날부터 서인도제도 지방병으로 잘 알려졌던 질환.
1493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보스 원정대원이 유럽에 퍼뜨렸다.

매독은 1614년(광해군 6) 이수광 저 '지봉유설'엔 천포창.
1506∼1521년 이후 중국에서 들어온 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매독 1기는 감염후 3개월까지이며 외음부에 응어리., 초기 증세.

매독 2기는 3개월에서 3년 사이에 전신의 림프선이 부어오른다.
매독 3기는 3년에서 10년까지이며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며 고름.
<가루지기전>의 변강쇠는 이 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간듯 싶다.

전국에서 모인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변강쇠가 걸렸던 성병.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 장승은 여성의 정절을 지키려는 안간힘.
왜적이 여성의 정절을 범하는 만행에 경각심을 일깨우려던 장승.

장승은 성기를 상징한 조각으로 매독의 경각심 위협목적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마을 어귀마다 세웠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하여, 그당시 장승은 저승사자처럼 인상이 험악한 것이 특징이다.


.........
보정.
..........


이조시대 서당에서는 <보정>이란 생리 철학(성교육)을 가르쳤다.
다산을 위해 귀숙일(씨내리는 날)을 정하고 부부 성교육이 <보정>.

즉, 임신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는 법을 배웠다
여자는 어머니로부터, 남자는 서당에서 논어를 마친 후 '보정(保精)'.
중국 도가서인 '포박자 (抱朴子)'의 예를 들어 20대는 3~4일에 한번,
30대는 8~10일에 한번이 적당하다고 성교 횟수까지 구체적으로 교육.

당시 남녀 모두 기혼 미혼을 막론하고 간통죄는 엄히 다스렸다
혼외 성관계는 간통으로 취급, 고소 여부에 관계없이 처벌했다.
다만 현장에서 발각되어야 간통죄가 성립되는 것은 지금과 같다.

이때 형벌은 장형 (杖刑) 80~100 대였다.
매춘부는 유교사회였던 이조때도 있었다.
기생은 공인, 유녀(遊女)는 비공인 매춘부.

간통 또는 순결을 잃은 여성들이 주로 유녀.
유녀 또는 과부가 재혼할 길은 오직 보쌈제도.
보름날 밤 정한수 한그릇으로 혼례를 대신했다.

그것은 월궁으로 도망친 항아를 불러내리는 의식.
남편의 폭력을 피하려고 달로 도망쳐 살았던 항아.
정한수 한그릇 혼례는 중추절의 유래에서 비롯된 듯
9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려 가뭄을 해소한 항아 남편.

10개 중 오직 하나만 남은 태양은 항아 남편의 상징.
정한수에 담긴 달 그림자는 백년해로를 바라는 염원.
항아가 오직 한 태양 만을 남편으로 섬기겠다는 언약.

칠성님과 밤하늘의 별을 혼인 하객으로 모신 예식.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칠성님께 기원.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식 중에서 가장 간소한 대례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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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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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담이 오가면 신부감을 선보는 간선 풍속이 있었다.
물론 선을 볼 때는 외모나 성품, 교양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들을 잘 낳을 만한 관상
당시 기준으로 삼던 다산 다남 관상은 아래와 같다.

눈매가 길고 눈끝이 젖지 말아야 한다.
눈썹이 길고 이마가 오똑해야 한다.
콧날이 서고 봉눈처럼 생겨야 하며,
목소리가 고르고 기가 족해야 한다.

피부빛에 광택이 나고 향취가 나야 하며,
살결이 부드럽고 습기가 촉촉해야 하는데,
얼굴이 거위나 벼룩상 일수록 좋다.

어깨가 모나지 않고 등이 두터워야 하고
손이 마치 봄에 솟아난 죽순 같아야 하며
손바닥 혈색이 붉어야 한다.

유두가 검고 굵어야 하고,
배꼽이 깊고 배가 두툼해야 하며,
엉덩이가 펀펀하고 배가 커야 한다.

남 싸울 때 끼어들지 않는 여인,
어려움에도 원망하지 않는 여인,
음식 먹는 것을 절제하는 여인,

무슨 얘기를 듣든지 놀라거나 기뻐하지도 않는 부덕함.
부덕을 갖추면 아들을 잘 낳을 수 있는 여인이라 여겼다.
머리카락으로 신부감의 출산력을 가늠하는 풍속도 있었다.
염탐꾼이 신부감 머리카락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상을 보기
머리카락이 굵고 빛깔이 푸른 검정색이면 다산 능력이 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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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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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백년해로가 미덕.
양반은 아내와 이혼하려면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처를 내쫓는다. 버린다는 뜻의 '휴기(休棄)'가 오늘날 이혼.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여자를 내쫓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남자가 이혼당할 수 있는 경우는 처를 팔았을 때,
그리고 장인 장모를 구타 하거나, 장모와 간통했을 경우.

보통 여자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 이라는 일곱 가지 죄목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여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
음란하고 투기하는 여자, 질병이 있는 여자, 말이 많은 여자
도벽이 있는 여자가 그것인데, 코에 걸면 코걸이식 이혼 구실.

그런데 비록 칠거에 드는 여자라 해도, 삼불거 (三不去)
3가지 경우에는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유교 윤리가 있었다.
즉, 조강지처. 부모 3년상 치룬 아내. 늙고 갈곳 없는 아내.

한편 이혼은 아니지만, 소박이라 하여 별거하는 경우
행실이 나빠 미움받기 보다 인물이 미운 경우가 대부분.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한 풍습이 빚어낸 불행이었다.
소박맞은 아내는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늙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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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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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에는 임신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월경.
순조로운 월경을 위해서는 심성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투기하거나 색을 밝히는 여자는 월경이 불순하다 믿었다.
반대로 바탕과 행실이 좋으면 월경이 순조로워 쉽게 임신.

남자는 정력이 좋고 욕심이 적고 마음이 맑아야 자손번창.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난잡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야 득남.
합궁할 때 아버지 심리상태도 무시할 수 없는 임신의 조건.

부친의 청결한 마음가짐은 모친의 10개월 못지 않게 중요
모성 태교 못지 않게 부성 태교가 태아의 인간 됨을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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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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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궁중에서 왕의 정력단련 및 건강 강화법
여름철이 오면, 왕과 왕비가 옷 벗고 잠자길 권유.
밤새 내장 독이 땀샘을 통해 배출되 피가 맑아진다.

초복이 지나면 말똥을 구하여 섭취하도록 했다.
박쥐똥 산토끼똥을 섭취하면 눈을 밝아지게 한다.
누에똥은 류머티즘이나 반신불수 치료제로 쓰인다.

사주단자 속 말똥은 음식 부패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
말똥 메주로 만든 장을 이용해 만든 오이냉국 미역냉국
우물 맨 밑바닥에 며칠간 보관해 두었다가 꺼내 먹는다

장작을 패면 허리와 배꼽(단전)에 원기가 모여들고,
성기(性器) 기혈 흐름이 원활해져서 정력에 도움된다.
성기에 찬물을 끼얹으면 죽었던 정력도 살아나는 효력.

궁궐에 여름이 찾아오면 도루묵과 개미알을 준비한다
도루묵의 이리(정액)는 이조시대에 일종의 정력제였다.

자기 몸무게 400 배 물체를 끄는 개미를 볶아 먹었다.
풍부한 단백질과 18종 아미노산 외에도 아연 구리 망간
특히, 아연성분은 생명의 불꽃이라 하여 인체효소를 합성

개미알을 으깬 뒤 꿀물을 타서 미약으로 사용했다.
개미알은 정력에 효험이 있어 개미죽을 쑤어 간식.
'10년 묶은 재래식 토종 간장' 이를 석장이라 한다.
환부에 석장을 올려놓고 쑥뜸을 뜨면, 정력이 강화.

여름엔 삼베옷 차림으로 둥근 원통형 죽부인과 동침
대나무의 서늘한 기운이 삼베옷에 침투하도록 했다.
죽부인과 가까이 하면 몸과 성적인 능력이 강해진다.

천근추 찹쌀을 9번 법제해 만든 미숫가루를 복용했다
위와 같은 음식요법이 궁중에서 행해지던 정력 보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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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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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모던 보이' 들이 드나들던 다방과 카페는 멋과 풍류의 상징.
1927년에 생긴 ‘카카듀’ 가 서울 최초의 다방이고 충무로와 종로에 몇 곳.
미술가 김용규(멕시코 다방, 종로 YMCA 근처), 복 혜숙 (뷔너스, 인사동)

예술인들이 개업한 다방은 문화장소로서 각광받았다.
카페에서는 여급이 술을 따랐고 커피 한잔에 10∼15전,
맥주는 한 병에 40 전으로 설렁탕 값보다 조금 더 비쌌다.

그 당시 노동 일당은 대개 60∼80전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허울 좋은 룸펜 멋쟁이들은 커피 한잔 마시고,
밥값이 없어 끼니를 건너 뛰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손탁호텔>
1918 년에 문을 닫고, 이화학당으로 바뀌었다.

구한말 친미파, 친러시아파 정치무대 손탁호텔.
1910년 철도국 직영의 조선호텔이 1914년 독립.
1938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반도호텔

2차 대전이 일어나 1945년 8.15 해방까지
구한 말의 여성들은 정신대로 징집되었다.

'한반도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징집 되었을까?'

적게는 4만명 많게는 2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신대 징집은 15만∼20만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우리나라는 중국 필리핀 점령지와 다른 형태로 징집.

나물 캐는 처녀를 억지로 끌고 가는 강제연행이 아니라
취업사기 인신매매처럼 공창제도 매카니즘을 이용했다.

1950년 6.25 동란 이후 양공주가 급격히 늘어났다.
1970년대 기생파티 일본 관광객들 여파로 매춘 범람.
그후부터 관광호텔과 요정이 늘어나며 유곽촌이 성행.

역사 상 성풍속이 문란했던 나라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모두 패망.

임진왜란 7년간 13만 명(인수 10%)이 죽거나 포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왜군이 저질렀던 만행.
코 귀를 베고, 가죽을 벗겨 인육까지 삶아 먹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항상 어린아이와 여성.
피임 방법도 없어 능욕 당한 후 자살했던 여성들.

1차대전은 1천만 명, 2차대전은 4~5천만 명의 사상자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한국전 2백만, 월남전 2백만 명.
이란, 이라크전에서 1백만 명. 그 희생의 대가는 전무.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 결과 이외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전쟁.

전쟁의 아픔은 새로운 불행을 초래한다.
전쟁후 군인 주둔지는 창녀촌으로 변모.
가장 잃은 여인의 마지막 생계수단 매춘.

우리나라 창녀촌 대부분은 외국 군인 주둔지역.
그곳에는 돈을 쉽게 벌려는 여성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또 다른 매춘 문화가 독버섯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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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하늘 아래 첫동네'라는 심원마을.
불과 10 여 가구가 사는 오지 중의 오지다.
이 마을은 울창한 숲과 심산유곡을 끼고 있다.

'한여름 밤의 꿈' 멘델스존 관현악곡

셰익스피어 희극을 음악으로 표현한 멘델스죤.
아마존 여왕 히포리다의 '환상적인 혼례의 밤'.
네 쌍의 결혼이 이뤄진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바로 이 희극과 음악이 떠올려지는 심원마을.
반야봉, 날라리봉, 노고단, 종석대 등의 준봉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모여 이루어진 심원계곡

울창한 숲과 차디찬 옥수가 어우러진 심산유곡.
한여름 밤엔 긴 소매 옷을 입어야 할 만큼 춥다.
'쏴아' 하는 물소리, 눈부시게 총총한 밝은 별빛

'그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별궁터..달궁.'

'마한 왕조의 마지막 왕궁이자 별궁 터.
백제와 가락국 연합군이 점령했던 곳이다.
백제와 가락국은 마한처럼 해상 무역왕국.

옛부터 해상무역 항구 도시에는 공창이 성행.
심원계곡 달궁은 '한 여름밤의 꿈'같은 피서지.
달궁은 오늘날 공창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있다.

'마한 패망왕조 궁녀들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

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신분 제도가 엄격했다.
백제 왕실 귀족이 지배층, 평민과 노예는 피지배층.
평민 밑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 죄인, 빗쟁이 등

백제의 형벌은 가혹하여 살인자와 반역자는 참수형.
여자를 범간한 자는 그 여자 남편의 노예가 되었다.
살인자가 참수형을 모면하려면, 노예 3명을.. 헌납.

패망 마한 궁녀들은 백제에서 관기로 전락했을 듯.
백제에 전쟁 빛을 갚기 위해 대물림으로 관기 신세.
남원 기생의 유래는 마한왕조의 패망 이후부터 인듯.

678년 나당 연합군 공격으로 백제의 사비성 함락.
웅진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은 웅진 사비성에서 항복
백제의 수많은 포로와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는 신세.

'의자왕은 왕자들과 함께 첫배 타고가다가 병사.'

그후 백제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통치를 받았다가
백제 영역은 당나라에서 통일신라로 넘어가게 된다.
당나라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패망 백제인들.

신라에 귀국한 장보고가 신라인이라던 당나라 노예들.
한반도 웅진도독부를 통해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들.
백제 패망 이후 장보고 시대에 그들은 당연히 신라인.

백제인 석공들은 불국사 석굴암 노역에 강제동원.
백제 궁녀들은 통일신라의 관기나 기생으로 전락.
고려와 이조때 원(元) 명(明) 청(淸)에 보낸 공녀.

일부는 귀족이나 고관의 후실이 되어 부귀를 누렸다.
그러나, 딸을 가진 부모 대부분 공녀를 피하려 했다.

공녀 폐단에 대해 충렬왕 때 박유(朴楡)가 지적했으며,
이곡(李穀:1298~1351)도 비참상을 극론하고 폐지 요청.
고려와 이조 때 그로 인해 조혼하는 풍습이 성행할 정도.

한편, 원나라에서는 고려 여인들이 많이 활동했기에
의복·기물·음식 등의 고려 풍속이 유행하게 되었다.

원나라 공녀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끝났으나
명나라도 공녀를 요구해 이조 때에도 공녀를 공출.

명은 원과 같이 많은 공녀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명 태조의 후궁으로 함산공주를 낳은 한비(韓妃)와
영락제(永樂帝)를 낳은 석비(碩妃)는 공녀출신이었다.

명에 대한 공녀는 세종(世宗) 때 완화되었으며,
1521년(중종 16) 때 철폐를 요청해 허락받았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이후 공녀를 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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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확립된 관기제도가 계승된 이조시대.
달궁은 홍수 산사태로 인해 별궁 터도 사라진듯.
이조 시대의 관기는 국유재산으로서 관아에 소속

관기는 사신, 지방 관리, 원님 등을 섬기는 역활.
따라서, 이조시대의 지방 관청은 별궁을 대신한듯
달궁은 고려와 이조시대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

'그대신, 남원 관청이 그 역활을 대신했을듯.'

이조시대 엄격한 유교관 영향으로 관기제도 확립.
고려 때 공녀로 인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
어염집 규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관기제도.

그러나, 이조 관기제도는 기생 풍류문화로 발전.
이조 후기에는 성풍속이 문란해지는 결과를 초래.
대원군은 이조 3대 병폐로 평양 기생을 꼽을 정도.

이조시대 변방 군사 등을 위한 공창제도가 있었다.
3 등급 관기 중에서 3패 기생이 주로 공창을 맡았다.
변방군사 사기를 돋우기 위해 위문 공연단도 파견했다.

'위문 공연단은 주로 연회 취흥을 돋우는 역활.'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패전국 여성들은 전리품.
임진왜란, 정묘효란을 비롯 병자호란 때에도 마찬가지.
청군의 전리품으로 잡혀간 비극의 여성들이 훗날 환향녀.

패전국 궁녀를 관비로 삼아 전쟁빛를 청산케한 백제.

패전국 궁녀가 몸으로 빛을 청산케 했던 백제 관비제도.
관비는 승전국 변방 군사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일도 했다.
관비는 국가에서 관리했기에 그것이 오늘날 공창의 출발점.

유곽은 공창을 뜻하며 매춘은 구석기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자가 사냥한 고기를 얻으려 여자가 몸을 허락하면서 유래.
서양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누는 키스는 고대 유목민 풍습.

키스는 원래 남자가 사냥해서 여자에게 맡긴 고기를
남자 없을 때 여자 혼자 몰래 먹었는지 확인하는 행위.
여자는 믿고 맡긴 고기를 먹지 않았음을 알리려고 키스.

원래, 여성의 입맞춤은 배고픔을 호소하는 몸짓.
남성에게 고기를 얻으려고 하는 여성의 구애방법
하여, 입맞춤은 사냥이 주식인 유목민에게 생활관습.

신석기시대 아시아 농경문화
밥뜸 냄새 때문에 남자가 구애.

모계사회에서는 한 지붕안 가족도 아닌 남자
밥을 얻어먹기 위한 모계사회 여성에게 구애.
따듯한 밥 한끼 잘 얻어먹으려면 정성껏 구애.

신석기시대 토탬신앙 발달로 무녀가 족장이 되었다.
청동기 무기로 수렵하는 유목민 부족이 번성한 시기.
농경민족이 수렵 유목민들에게 싸워 이길 수 없었다.

하여, 무녀가 이끈 모계사회는 부계사회에게 조공.
무녀는 부계사회 제사장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고대국가에서 군신관계를 맺는 조공 제도로도 발전.

약소국에서는 해마다 미인을 선발해 강대국에 조공.
나당연합군으로 국가위기를 넘긴 신라도 미녀를 조공.
양귀비 미모에 빠져 정사를 망친 당 헌종이 그 주인공.

'미인 선발대회를 매년 열었던 신라.'

국가 사활이 걸린 외교사절을 뽑았던 신라.
아름다운 몸매와 옷맵시, 세련미 넘치는 자태.
예의범절과 외국어 실력.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

'오늘날, 세계각국에서의 미인 선발대회로 발전.'

단체생활을 통한 예의범절 심사, 우아한 드레스 차림 등등.
아름다운 미녀들의 수영복을 입은 몸매 심사가 하일라이트.
결혼한 경험이 있다거나 사생활이 문란한 처녀는 실격 처리.

'선발된 미녀는 국위선양을 위한 외교사절로 파견.'

신라를 대표하는 미인선발대회는 성대하게 치뤄졌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미인을 뽑는 미스 월드 콘테스트.
신라의 미녀들은 당나라의 실권자들과 혈연 관계를 형성.

'신라와 당나라의 오랜 밀월관계 그 사실을 뒷받침.'

헌종이 죽을 때까지 헤어 나오지 못했던 양귀비.
그녀는 어떤 매력으로 당 헌종을 사로잡은 걸까?
오늘날, 양귀비(예쁜이) 수술에 그 답이 있는 듯.

'국가 간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는 노비, 여자는 관비.'

하여, 계급 신분 빈부 격차가 생겼고 관비제도가 생겼다.
백제와 이조는 양반과 상민 천민 노비 신분 차이가 현격.
신라에 패망한 백제는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통일 신라 말, 왜구들이 한반도 부녀자들 납치사례 빈번.
왜구가 부녀자를 겁탈하고 끌고 간 사례는 이조까지 계속.
납치한 남자는 노비로 팔고 부녀자는 유곽에 팔아 넘겼다.

이조는 당나라와 고려 관비제도를 본받아 관에서 기생을 관리.
관비제도를 삼패로 나눠 일패 이패는 기생 삼패는 창기라 했다.
이조는 유교관념과 위배되는 창기제도가 15 세기에 사회 문제화.

'세종 시절 청백리' 좌의정 허조(1369~1439)
관비제도 폐지를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재들이 어염집 여인을 범할 것을 우려한 때문.
인재들이 벌받게 될 만큼 그당시 성풍속은 문란.
이조는 유교관을 고수하면서도 창기제도로 고심.

12 ~13세기 중국 원나라로부터 1세기 동안 지배 받았던 이조시대.
1592년 선조 25년부터 선조 31년 11월 노량해전으로 끝난 임진왜란.
16세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 불모로서 잡혔갔던 환향녀.

'청나라에 값비싼 속전을 치루고 귀향했다 하여, 환향녀.'

이미 정절을 상실해 이웃과 가문의 냉대 속에서 살아간 비운의 여인들.
환향녀는 귀국 후에도 갈 곳이 없어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12~17세기는 한반도 여인이 가장 애환을 겪었던 이조의 여성수난 시기.

그당시 청나라로 잡혀가 정절을 잃은 수모를 잊으려고 복용했다는 아편.
환향녀들이 온갖 수모와 비난의 눈길을 감당할 수 없어 또 손을 댄 아편.
한반도에서는 그당시 환향녀를 통해 아편문화가 번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여파로 이조의 고루한 유교사상에도 불구하고
이조 후기에는 성풍속도가 극도로 문란하게 된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성풍속도 그림을 보면 오늘날 수준.
동성애에 빠져있는 두 여인과 한 남자와의 문란한 정사.
사찰에 불공드리러 온 규수를 덮친 스님과 엿보는 동자승.

안방마님 대담한 정사장면을 망보 듯 훔쳐보는.. 몸종 하녀.
2 : 2 또는 달밝은 밤에 야외에서 벌어지는 대담한 정사 신.
담배대를 문 기생이 한낮에 양반 무릎위에 앉아 벌리는 정사.

구한말 일제치하의 한반도 기생문화는 유곽문화로 변모..
환각제는 아편이 유곽을 중심으로 독버섯처럼 퍼져간다.
구한말 나라 잃은 설움을 아편으로 달랜 인테리 지식층.

우리나라에서 유곽문화 역사
2006년 102년째 되는 해이다.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를 경유해
일본에서 성행한 매춘 유곽문화.

그 유곽문화가 구한말 일제에 의해
다시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일제는 기생들을 권번에 소속하게 하여 출퇴근·근무하게 했다.
예전엔 명월관 기생과 어울리려고 상경했던 지방 유지들도 많았다.
한치도 안되지만 천석군 전답이 들어가도 채울 수 없는 기생의 그 곳.

산자락 두개 아래에 입 口를 써서... 계곡 谷,
그 옆에 사람 人변을 더한 한자어... 세속 俗.

계곡 谷은 기생 또는 여성의 그곳을 상징하기도 하는 한자.
사람이 산에 오르면 신선 선(仙), 계곡으로 가면 세속 속(俗).

'그 한자의 의미가 마음 깊이 와 닿는.. 기생 문화.'

망국의 설움을 달래려고 기방에 파묻혀 지낸 구한 말 지식인들
일본인들은 경성에 오면 반드시 들렀다는 ‘조선의 정취’ 명월관.
당시 서울의 큰 요릿집으로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태서관 등등.

기생은 일본의 ‘게이샤’ 와 마찬가지로 품위와 기예를 갖춘 예술인.
‘창기(娼妓)’ 라 부르는 본격적인 매춘 문화는 일본을 통해 들어 왔다.
나라에서 공인된 매매춘지역, 즉 공창(公娼)지대를 ‘유곽’ 이라 불렀다.

서울에는 1905년에 생긴 신정유곽이 8.15 해방 당시까지 영업했다.
그러나, 그당시 공창보다 카페 바 여급들의 은밀한 사창이 더 많았다.
서울의 유곽은 충무로 혼마치, 남산 일본인 유곽촌인 신마치가 있었다.

지금 엠배서더 호텔 일대이고 그 맞은 편이 조선인 유곽촌 병목정.
용산에는 일본군을 상대하는 도산유곽이 있었고 현재 마포구 도화동.
일본인 유곽엔 유녀들이 나오지 않고 현관 양쪽에 사진을 걸어 놓았다.

조선인 유곽촌은 현관의 넓은 방에 유녀들이 앉아있고 손님이 직접 선택.
일본 여성들은 큐슈에서 많이 왔고, 조선의 유녀들은 대부분 농어촌 여성.
조선인 유곽촌 끝에는 러시아 유녀집이 있었는데, 손짓으로 행인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