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이 오랜 세월 검증과 고증을 거쳐오면서 발전시켜온 전통지리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인 이 땅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내고 표현해 낼 수 있다. 산줄기가 강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산맥의 혼돈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대안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일제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산맥개념은 하루속히 우리의 전통지리관인 백두대간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도만 가지고도 우리의 산줄기와 강줄기의 근본을 알 수 있고, 우리 민족사의 굴곡들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백두대간, 살아 꿈틀거리는 불가항력의 힘이 느껴지는 거대한 산줄기는 바로 이 땅의 역사 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 체계를 정착 시켜 나간다면 머지않아 백두대간이라는 가슴 벅찬 이름이 제대로 대접받는 날이 올 것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산이 곧 분수령이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한반도의 등뼈를 이 루는 백두대간은 동과 서를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임과 동시에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역할을 한다. 태초에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은 저마다 대간의 저력 을 닮은 모습으로 한반도 구석구석으로 가지를 쳤다. 그렇게 해서 대간(大幹),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을 일구어 냈다. 기둥 줄기인 대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10대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인 정맥들이 국토의 뼈대가 되고 있다.
백두대간은 1625여km에 이 른다. 우리가 아직 가볼 수 없는 북녘 땅에는 2000m급의 고봉들이 줄이어 있다.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약 670km에 이르는 거리에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 등을 품 고 있다. 한반도를 일군 백두대간은 대륙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하여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기운으로, 이 땅의 근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 한다.
백두대간의 개념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의 지리관으로 자리잡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러나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료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조선 초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지도상에 반영되었을 것이 란 사실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단지 사료가 없어 고증이 안될 뿐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산경표>에서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산경표>는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19세기에 고산자 김정호는 심혈을 기울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대동여 지도는 정밀함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도로 인정받고 있 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우리 지리관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산경표>는 전국의 산줄기를 1대간(大幹), 1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 했고 여기서 다시 가지친 기맥(岐脈)을 기록했다. 산줄기의 순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중심 산줄기로 하고 여기서 가지친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우선하고, 백두대간 의 북쪽으로부터 가지친 차례대로 그 순서를 정했다.
백두대간과 정백정간은 산이름을, 해서나 호남은 지역 이름을, 나머지 11개는 강이름에서 따 와 산줄기의 이름을 정했다. 때문에 이름만으로도 강의 위치와 지역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강이름을 따다 이름을 지은 것은 정맥의 정의를 강유역의 경계능선, 즉 분수령으로 해석했 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위치, 유역의 넓이, 모양을 알아보기 쉽게 하여 강과 그 유역을 파 악하여 지형지세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산이 곧 그 강을 이 루는 물의 산지라는 인식를 비롯하여 산경표는 활용도를 중요시 하여 제작된 지도였다.
1913년 최남선은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출판한 적이 있었다. 하 지만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그 가치는 묻혀버렸고 영영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1980년 겨울,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는 우연히 인사동 고서점에서 "산경표"를 발견했다. 당 시 대동여지도 복간을 준비하던 중 몇가지 의문에 고심했던 이씨에게 "산경표"는 문제를 푸 는 열쇠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우형씨는 백두대간을 알리기 위해 많는 노력을 하였다. 그 결실을 거두어 백두대간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